Saturday, December 17, 2011

음반 "Poesi"-디아나 담라우(Diana Damrau)

지난 학기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베르디의 "리골레토"를 봤었는데 담라우가 극중 여자 주인공인 "질다"역할을 했었다. 이 역할은 곱고 청아하면서 서정적인 음색의 소프라노들이 잘 부르는데 담라우는 정말 꾀꼬리같은 가창을 들려주었었다. 사실 뮌헨에 있을 때 오페라 축제를 비롯해 담라우 공연이 몇번 있었긴 했는데 가진 않았었다. 지금와선 정말 후회되지만 다행이 메트에도 자주 서는 편이라 담라우 공연이 있으면 되도록 가려고 하는 중이다. 내년 봄에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주역으로 나올 예정이다.

리골레토 때의 감동을 되새기면서, 얼마전에 주문한 디아나 담라우의 CD가 도착해서 찬찬히 듣고 있는 중이다. 원래 오페라 아리아들만 담고있는 음반만 살려고 했으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가곡 음반도 보이길래 그것도 같이 주문했는데, 이 가곡 음반의 완성도가 생각보다 굉장히 높은 편이다(물론 오페라 아리아 음반도 참 좋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 가곡 음반을 계속 듣다보면은 슈트라우스 가곡이 너무너무 공부하고 싶어진다.

Poesie - R. Strauss Lieder
*음반의 표지. 크리스티안 틸레만 지휘의 뮌헨필이 반주하였다. 예전 뮌헨 시절의 기억들을 불러오는 이름들. 특히 17번째 수록곡인 "장미꽃 띠"의 경우엔 지난학기 수업시간에 어떤애가 기말 과제로 발표했었는데 그때 듣고서 너무 좋은 나머지 집에와서 Youtube를 뒤져 수십번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음반에 수록된 곡은 다음과 같다.

 1. Ich wollt ein Sträußlein binden            
 2. Waldseligkeit                              
 3. Das Bächlein                
 4. Winterweihe                               
 5. Morgen                         
 6. Allerseelen                  
 7. Cäcilie             
 8. Amor                              
 9. Säusle, liebe Myrthe
10. Freundliche Vision   
11. Städchen     
12. Traum durch die Dämmerung             
13. Wiegenlied 
14. Meinem Kinde          
15. Muttertändelei         
16. Zueignung                   
17. Das Rosenband Op.36 No.1                 
18. Heimkehr Op.15 No.5            
19. Als mir Dein Lied erklang Op.68 No.4               
20. Des Dichters Abendgang Op.47 No.2               
21. An die Nacht Op.68 No.1      
22. Lied der Frau Op.68 No.6       

*들어도 들어도 계속 좋은 "Der Rosenband"(장미꽃 띠). 담라우의 목소리, 콜로라투라 기교, 해석 전부 다 완벽하다. 동시에, 전통적 방식의 전조 모델을 따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성의 매력을 내뿜는 슈트라우스의 음악적 어법 또한 참으로 탁월한 거장의 경지를 보여준다.
(Youtube Cr: ivanleop)


카우프만도 가곡 음반으로는 유일하게 슈트라우스를 녹음하였는데, 본인 추측에, 슈트라우스의 가곡들이 음악적으로나 시적으로나 상당히 뛰어난 편이라는 점 외에도, 바이에른 출신인 두 사람이 주도인 뮌헨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한 슈트라우스에게 더 친근감을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Sunday, December 11, 2011

구노의 "파우스트"(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르네 파페를 위한 오페라

Ode to Rene Pape

어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쏘아주는 구노의 "파우스트"를 극장에서 보고왔다. 실제 공연은 이번 화요일날 볼 예정이다. HD로 해주는 것을 보러 간 이유는 주역인 요나스 카우프만(Jonas Kaufmann), 마리나 포플라프스카야(Marina Poplavskaya), 르네 파페(Rene Pape) 이 세사람을 보기 위한 이유가 크다. 카우프만이야 연기와 노래가 워낙 완벽하다보니 두말할 이유가 없고, 마리나의 경우 인터뷰때 동문서답을 한다는 것 빼고는 목소리가 참으로 우아하고 기품있기에 좋아하는 것이다.

르네 파페 또한 독일 베이스로서 예전에 베를린에서 "파르지팔" 공연을 본 적이 있다. 헌데 파페에 대해 워낙 대단하단 소리를 두 사람으로부터 들었기에 이번 공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한명은 미국인 친구인데, 어느날 파페의 메트 공연을 봤는데 공연 후 10분간 "standing ovation"(기립박수)이 쏟아졌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렇게 장시간 기립박수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여태 메트 공연 보러간 이래 처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또다른 사람은 학교의 윌리엄 스승님이신데 이번 금요일날 파페 때문에 파우스트 보러가신다고 하였다. 이유는 예전에 파페의 "구르네만츠"(바그너의 "파르지팔" 속 narrator에 해당하는 역할)를 보고서 이 역할이 처음으로 너무나도 재밌고 감동적으로 느껴졌는데, 그전까지는 다소 지루한 역할이었다고 그러셨다.

도대체 어땠길래 이 두사람이 저렇게 칭찬을 하는건지? 베를린에서 파페의 파르지팔 공연을 봤었지만 그렇게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그때는 사전 지식도 부족했고 오페라를 보는 눈이 아직까진 덜 발달되서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번에 아무래도 극장에서 보여주는 큰 스크린상에서 가수들이 연기하고 노래하는 것을 생생하게 관찰하다 보면은 좀 더 다른 면이 감지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졌다.

역시...뚜껑을 열고보니 위의 두 사람이 왜 그리 말했는지를 완전히 100%이해할 수 있었다. 구노 오페라의 타이틀은 "파우스트"이지만 이날 공연에 대한 소감은 파페의 "메피스토펠레스"(파우스트와 거래를 하고서, 파우스트의 영혼을 사게되는 악마 역할)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정도로 파페의 뛰어난 연기, 무대 장악력, 배우적 카리스마, 탁월한 가창이 돋보인 무대였다. 평소 카우프만이 나오는 오페라(카르멘, 토스카, 발퀴레 등등)에선 워낙 카우프만이 신들린 역기력과 노래로 무대를 압도하기에 상대역 성악가들이 오히려 묻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엔 오히려 반대로 파페의 아우라가 카우프만을 덮고도 남음이 있었다. 물론 카우프만도 항상 그렇듯이 뛰어난 연기력과 노래를 몰입된 상태로 보여주었다.

파페의 역할이 아무래도 거래에서 이기고서 영혼을 파괴시키는 악마(드라마적 승자) 역할이기에 포스나 카리스마 면에서 우위에 서는건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정해진 캐릭터를 마치 무대위에서 살아 숨쉬고, 완전 빙의 되었다 할 정도로 매력 넘치게 창조해내는 것은 오로지 가수의 몫이다. 때로는 코믹하게(사랑의 메신저), 때로는 위협적으로(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는 다크 포스), 때로는 불쌍하게(십자가나 기도 장면이 나오면 약해지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가진 면을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표현하였다. 군무 장면에서는 지팡이 봉을 휘두르며 춤도 추면서^^

한다미로, 오페라는 파우스트가 아닌 파페의 "메피스토펠레스"였다. 집에 와서 바로 한 일은 얼른 아마존을 검색해서 파페의 음반을 주문하는 것. 올해 나온 바그너 음반인데, "발퀴레," "파르지팔," "명가수" 등등 내가 좋아하는 곡들은 다 들어있다.

 Wagner: Arias from Die Walkure

그리고 이건 2008년에 나온 음반으로서, 오페라 내 신, 왕, 악마와 같이 주로 바리톤이나 베이스 가수들이 주로 맡는 역할만 엄선해서 구성한 음반이다. 첫 두곡이 구노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곡들이다.

Gods, Kings & Demons (Opera Arias)


르레 파페.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대단하고 또 대단한 베이스, 르네 파페. 화요일날 라이브 공연이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

Wednesday, November 30, 2011

Saturday, November 26, 2011

푸치니에 관한 영화, "Puccini e la fanciulla"

푸치니에 관한 영화, "Puccini e la fanciulla"(푸치니와 아가씨). 2009년도 작품이고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아마존에 혹시 DVD가 있나해서 찾아보니 안 보인다. 링컨센터 도서관에 제발 있어야되는데...리뷰를 읽어보니 영화가 대사는 거의 없고 편지와 메모로 소통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대신 음악이 끊임없이 나온다고 한다.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인 "서부의 아가씨"(La fanciulla del West-작년 12월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Deborah Voigt주연으로 봤었다. 이 작품은 1910년 메트에서 초연되었고 당시 푸치니가 배타고 뉴욕까지 와서 초연을 관람했었다)의 창작 과정을 둘러싼 에피소드에 어느정도 기반하고 있는 듯. 


*Official Trailer of "Puccini e la fanciulla". 2:18에선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에 나오는 주제 선율이 들린다. 이 선율이 오페라에선 연인의 딕 존스의 목숨을 구하려는 미니와, 딕 존스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있는 보안관인 랜스 사이의 긴장감과 스릴 넘치는 포커 게임 장면에서 나온다. 아래의 클립은 바로 그 포커게임 장면인데 보이트가 메트에서 공연한 것을 녹화한 것이다. 여태까지 봤던 보이트 라이브 공연 중 최고였다. 
(Youtube Cr: operalover9001)


푸치니의 중기에서 후기작품으로 갈수록 화성의 사용이 대담해지고, 불협화를 다루는 방식도 바그너에 버금갈만큼 급진적이 된다. 물론 바그너에 비해서 표면적으론 덜 반음계적이긴 하지만 이전 세대인 베르디나 동시대인 칠레아, 죠르다노같은 다른 베리즈모 작곡가들에 비해서도 푸치니는 훨씬 실험적이다. 해결되지 않는 불협화음, 증화음, 병행 화성, tritone, 온음계 스케일 등등 당대 바그너와 드뷔시로 대표되는 혁신적 어법들이 푸치니에서도 그대로 보인다. "서부의 아가씨"는 후기 작품이기에 특히 그런 면모가 많이 드러난다. 나의 보스이신 T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서부의 아가씨"의 경우 "음악" 그 자체라기 보다는 "음악적 방향"이 바그너쪽으로 가고 있는 걸 보여준다고 그러셨다.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고 분석할 거리가 많이지는 것일 수도. 

Friday, November 25, 2011

영화 "A Dangerous Method"-사운드트랙으로서의 바그너 음악

올해 9월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영된 "A Dangerous Method"를 보고왔다.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프로이트와 융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생각지도 못했던 바그너의 음악. 읽어본 어떠한 프리뷰나 리뷰에서도 바그너의 "반지"를 모티브로 한 음악들이 쓰였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기에 바그너 음악이 쓰였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A Dangerous Method"의 공식 트레일러. 처음 나오는 음악은 "라인의 황금" 중 니벨하임의 대장간 음악을 변용한 것이다. 

때로는 원래 선율 형태로, 때로는 변화된 리듬과 화성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나오던 "반지" 라인들-"라인의 황금"에 나오는 서곡, 니벨하임의 대장간 음악, 발할라 주제, "발퀴레"에 나오는 지그문트와 지글린데 선율들(이 둘은 생각만 해도 너무나도 가슴아픈 커플이다), 발퀴레 주제, 불의 신인 로게의 화음, "지그프리트"에 나오는 지그프리트 목가 선율 등... 이 "반지" 음악 때문에 계속해서 메트에서 했던 "발퀴레"와 "지그프리트"가 떠올랐고, 특히 "발퀴레"에서 지그문트와 지글린데 역할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던 두 성악가(Jonas Kaufmann&Eva-Maria Westbroek)까지 계속 생각났다. 어떨때는 대사보단 음악에 귀기울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더불어 "반지"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로버트 도닝턴의 책 "Wagner's Ring and Its Symbols"도 기억났다.

전반적으로 봐서, 이 영화에 반지의 선율들을 사운드트랙으로 쓴 것은 너무나도 기가막히게 적절한 선택이다. 반지에 나오는 각 선율들이 상징하는 바와 그 선율들이 나오는 드라마적 컨텍스트가 영화의 내러티브와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영화에 대한 자세한 분석 및 음악의 사용에 대해선 다음에 따로 포스팅을 할 예정이다.)

영국식 액센트가 들어간 영어에다 뜻하지 않게 만난 바그너 음악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대사를 세세하게 다 이해하진 못했다. 바그너의 음악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쓰였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반지"의 내러티브를 따라간 듯한 인상을 주었던 영화. 특히 지난 5월말부터 완전히 빠져 있었던 "발퀴레" 속 지그문트와 지글린데 선율이 끊임없이 나오기 때문에 영화에 몰입하는 것이 참 힘들었다. 사운드트랙 때문에 이렇게 영화보는게 힘들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다 디테일한 리뷰를 위해서 한번 더 보거나 아님 아마존에 떠있는 책을 사서 보거나, DVD를 봐야할 듯.

A Dangerous Method (Movie Tie-in Edition): The Story of Jung, Freud, and Sabina Spielrein by John Kerr: Book Cover
*"A Dangerous Method"의 책 버젼 표지-왼쪽이 융(Carl Jung), 중간이 자비나 슈필라인(Sabina Spielrein), 오른쪽이 프로이트(Sigmund Freud)


*반지의 특정 주제가 들릴때면 항상 떠오르는 연상들 

1. 니벨하임의 대장간 음악-스토니브룩에서 마지막 학기에 썼던 페이퍼인 “Transformational Music in the Ring Cycle”과 바그너 좋아하는 예전 지도 교수 

2. 발할라 주제- eine herrliche Des-Dur Musik. 당당하고 위엄있는, 신들의 대장으로서의 보탄의 음악 

3. 지그문트와 지글린데-메트 오페라에서 두 역을 연기했던 요나스 카우프만와 에바-마리아 베스트브룩. 오페라 나오는 캐릭터들 통틀어 가장 맘 아픈 커플…눈물없이 볼 수 없음. 

4. 발퀴레 주제-Weitzmann과 증3화음 (“Der übermässige Dreiklang”: 이론사 시간에 요약 숙제로 했던 논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발퀴레” 프로덕션 중 3막 오프닝 장면, 데보라 보이트(Deborah Voigt) 

5. 로게 주제-Neo-Riemannian LPR cycle, 변형이론에 기반한 David Lewin의 분석, 발퀴레 엔딩 장면에서 항상 보이는 불이 번지는 모습 

6. 지그프리트 목가-2007년도에 방문했던 스위스 루체른 근교의 Tribschen에 있는 바그너 생가. 이곳에서 바그너는 아내인 코지마의 생일 선물로 이 곡을 작곡하였고 이후 "반지" 중 지그프리트의 주제로 사용하였다.

Thursday, November 24, 2011

푸치니 "라보엠"-메트로폴리탄 오페라

11월 18일날 푸치니의 라보엠을 보고왔다. "나비부인" 및 "토스카"와 더불어 푸치니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헌데 이상하게도 그다지 흥미는 안가는 작품인데...라이브로 봐도 역시나 그렇다. 푸치니의 초기 작품이라 그런지 음악도 왠지 밋밋하게 들리고 드라마틱한 사건도 막판에 여자 주인공이 폐병걸려 죽는다는 점 말고는 없고, 다른 베리즈모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강렬한 감정적 묘사도 없이 그냥저냥 잔잔하고 정적으로 흘러가다 끝나는 그런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오페라를 보러 간 이유는 지난 학기에 라이브로 봤던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날 플라시도 도밍고 지휘)에서 주역이었던 홍혜경씨를 처음 보고 감동받은 나머지 이번 시즌에도 홍혜경씨 공연이 있으면은 꼭 가리라 마음 먹었었기 때문. 전반적으로 성악가들은 정말 잘해주었고 고전적이면서도 정교한 메트의 무대 디자인(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감독인 프랑코 제피렐리 작품)은 보는 내내 황홀하였다. 특히 2막의 커텐이 열리면서 너무나도 정성스럽게 치장된 카페 모무스가 드러나는 순간 관객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독일에선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미국인들(구체적으로 뉴요커들)은 무대가 기대이상으로 스펙터클하거나 화려한 비쥬얼로 압도할 경우 그 무대가 보이는 순간 박수를 보낸다. 바그너의 "발퀴레" 3막이 시작되었을 때도 그랬었다.


*2막의 무대인 까페 모무스에서 등장하는 무제타. 보통 "무제타의 왈츠"로 알려져 있는 "Quando men vo"를 부르면서, 자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지 보는 사람마다 다 넋을 잃고 쳐다보며 정신을 못차린다고 한다. 그런 무제타의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 연인 마르첼로. 2008년도 공연을 녹화한 동영상이지만, 18일날 본 공연과 같은 프로덕션 이다. 무제타의 저 빨간색 의상과 까페 모무스를 감싸던 화려한 오렌지 빛 조명은 1막과 4막의 창백하고 정적인 분위기와 대비되었다.(Youtube Cr: Onegin65).


홍혜경씨는 목소리는 정말 곱고 맑다. 음색은 청아하고 표현은 순수하고 프레이징은 유려하다. 사랑에 빠졌다 폐렴으로 죽어가는 미미역에 딱이다. 안나 네트렙코의 목소리가 조금만 더 가볍고 밝은 음색이었다면 아마 홍혜경씨 목소리와 비슷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50이 넘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정도로 마치 20대 소녀의 목소리와 같은 울림을 낸다. 

*"라보엠" 중 "내 이름은 미미"(Mi chiamano Mimi). 방에 촛불이 꺼지는 바람에 옆집에 불 빌리러 간 미미는 로돌포와 처음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지는데, 바로 이 노래가 미미가 자신을 소개하며 통성명 하는 장면이다. 유툽에서 메트 오페라 클립들을 찾아보니 이번 시즌에 홍혜경씨가 미미를 연주한 라이브 동영상은 안 보이고 대신 한국에서 공연을 녹화한 듯한 클립을 찾았다. 모든 연주자들이 다 그렇겠지만 홍혜경씨 목소리를 실제로 들었을 때가 훨씬 좋은 듯. 정말 깨끗하고 맑아서 마치 호수를 들여다 보는 느낌이다. (Youtube Cr: Seungtaik)


뉴욕타임즈에 리뷰가 올라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20일날 포스팅되었다. 홍혜경씨에 대한 평이 아주 좋다. 역시나... 알고보니 메트에서 50번이 넘게 미미를 공연한 베테랑이었다. 아래는 뉴욕타임즈 기사 링크.

http://www.nytimes.com/2011/11/21/arts/music/la-boheme-at-the-met-life-in-zeffirelli-style-review.html?_r=1&ref=music

뉴욕타임즈 기사 중 홍혜경씨에 대한 부분과 그 번역이다. 이날 내가 들었던 것과 거의 일치하는 평이다. 절제된 제스쳐와 맑은 목소리로 인해 청순하고도 소녀같은 미미 캐릭터가 창조되었다.

"Hei-Kyung Hong stole the show as Mimi, a role she has sung more than 50 times at the house since 1987: a reliable mainstay amid the starrier names that have come and gone. Almost a quarter-century after her first Met Mimi, Ms. Hong sounded fresh and radiant on Friday, her singing distinguished by beautiful phrasing and refined pianissimos. She was believably girlish as the sickly seamstress, offering an affecting interpretation that avoided consumptive clichés like excessive coughing and other stock gestures."

"홍혜경은 1987년 이래 메트에서 50번이상 노래한 역할인 미미를 맡아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태 메트를 거쳐간 더 유명한 스타들 사이에서도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가수이다. 메트에서 미미를 처음 부른지 거의 4반세기가 지났어도 홍혜경은 여전히 신선하고 빛나는 소리를 이날 들려주었다. 그녀의 노래는 아름다운 프레이징과 정제된 피아니시모로 빛났다. 병약한 재봉사(극중 미미의 직업)를 맡은 그녀는 정말 소녀같았다. 폐결핵 환자임을 보여주는 클리셰인 지나친 기침이나 여타의 상투적 제스쳐는 배제한 채, 깊은 연민과 감동을 불러오는 해석을 보여주었다."

이날 공연이 끝나고 누군가가 무대를 향해 던진 꽃다발 두개를 안고서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던 디바, 홍혜경씨를 다음 시즌에서도 볼 수 있길 바란다. 

Friday, November 18, 2011

새로나온 책-"희랍어 시간"

인터넷에서 신간 코너를 검색하다 발견한 책, "희랍어 시간"이 무지 궁금해졌다. 우선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왠 그리스어? 어학책인가 하다가 장르가 소설임을 알고나서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학술적 목적 이외 실생활의 소통 도구로서는 기능은 그다지 크지않은 그리스어를 주제로 하는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리스어가 영어나 불어처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본어나 중국어처럼 비즈니스 관련해서 각광받는 언어도 아닌데..그리스인이 아니면서 그리스어 배우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전학(Classical Studies), 고대철학, 신화, 역사, 미술 전공자인데 한국 작가가 특이하게 그리스어 수업을 소재로 해서 소설을 쓰다니 혹시 작가가 독일에서 그리스 비극같은 고대문학 전공하고 왔나하는 생각이 들어 이력을 읽어봤더니 그건 아닌거 같았다.

두번째로, 책 표지가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19세기 영국의 풍경화가 터너(Turner)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분명한 경계선이 흐려진 채 희미하게 보이는 대상의 형태, 습기를 머금은 대기를 나타나는 뿌연 수증기, 채도가 낮은 색상이 지배하는 책 표면은 터너의 "폭풍"(Snow Storm)과 흡사 비슷해 보였다. 터너의 그림은 사물의 형태가 해체되고 뭉게져서 결국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전환기적 면모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형태가 희미하게 어렴풋이 감지되는 상태이되 아직까지 완전히 구상의 차원을 벗어난 것은 아닌 그런 중간적인 위치이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희랍어 시간" 속 주인공들의 중간자적, 전환기적 정체성과 혹시 관련이 있지 않을지? 아니면  뭔가 다이나믹한 일이 곧 벌어질 것 같긴한데 아직까진 흐릿하게 보일 뿐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포착되진 않은 상태이기에 기대감과 긴장감, 호기심을 유발하려는 심리적 효과를 내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왼쪽은 윌리엄 터너(Turner)의 "Snows Storm–Steam Boat off a Harbor’s Mouth Making Signals in Shallow Water"이고 오른쪽은 소설 "희랍어 시간"의 겉표지. 두 이미지가 묘하게 닮은 것으로 느껴진다.

세번째로, 그리스어 관련된 몇가지 에피소드들이 기억났다. 가장 최근의 일로는 지난 여름 나의 보스이신 T선생님께서 그리스어 사전에서 "methesis"(참여, participation)라는 단어에 대해 찾아오라는 과제를 내리셨다. 그리스어는 영어알파벳이랑 다른 철자를 쓰기땜에 당시 위키페디아를 검색해 그리스어 철자와 영어철자가 어떻게 매치되는지를 봐가면서 난생 첨으로 그리스어 사전에서 단어 찾았던 기억이 난다.


*보스 선생님의 부탁으로 처음 찾아본 그리스어 사전에서 복사했던 일부분. 화살표가 가르치는 단어가 영어식 철자로는 "methesis"라 표기된다. 

네번째로, 그리스어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그리스어와 더불어 학술적인 의미가 더 강한 라틴어가 생각났다. 예전에 학부때 기초 라틴어 한 학기 배웠었는데 고대언어라 그런지 영어나 독일어에 비해 확실히 격변화도 많고 복잡했던 기억이 난다. 허나 라틴어 배우고 나니 영어나 독어 단어력을 늘리는데도 도움이 많이 되고, 유럽의 대학 도서관이나 오페라 하우스 외관에 쓰여진 라틴어도 조금씩 이해가 되었던 것 같다. 당시 수업을 맡으셨던 강ㅅㅈ 선생님도 참 좋았었는데 지금은 모교 철학과 교수로서 고대, 중세 철학을 가르치고 계신 듯.

뜻하지 않게 본 책 한권의 제목과 표지가 여러가지 단상과 기억의 조각들을 불러온다.

Monday, November 14, 2011

이우환-예술이란...

"아까 거리를 걷는데, 은행나무 잎 하나가 하늘하늘 내려오더니 내 앞에 뚝 떨어졌어요. 아직도 그 은행잎이 그린 포물선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요. 드문 일이죠. 예술이란 그런 거예요. 늘 있는 일을 일부러 눈에 띄도록, 스쳐 지나갈 수 없도록 만드는 거."

오늘 조선일보에 실린 이우환 화백의 인터뷰 중 제일 마지막 말이 너무나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예술이란 일상적인 것을 비일상적이고 특별한 것으로 보이게끔 하는 묘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알고보면 3화음의 단순한 연장일 뿐이며, 알고보면 간단한 I-IV-V-I의 화성 진행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알고보면 삼각관계 하다가 다 망했다는 스토리일 뿐이지만 베토벤, 바그너, 베르디 등등 우리가 아는 작곡가들의 예술작품은 이런 상투적 내용을 가지고서도 기막히게 요리하여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켜 결국엔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되는 묘한 능력이 있는거 같다. 


*Schubert, "An die Musik" sung by Christa Ludwig. 
(Youtube Cr: operazaile)



Schubert, "An die Musik" (음악에 부쳐)

Du holde Kunst, in wieviel grauen Stunden, / 그대 아름다운 예술이여,

Wo mich des Lebens wilder Kreis umstrickt, / 힘들었던 나의 많은 시간 동안

Hast du mein Herz zu warmer Lieb' entzunden, / 내 마음을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주며

Hast mich in eine beßre Welt entrückt! /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하였습니다!



Oft hat ein Seufzer, deiner Harf' entflossen, / 때로는 한숨이 그대의 하프에서 흘러나왔으며,

Ein süßer, heiliger Akkord von dir / 달콤하고 성스러운 화음이 그대로부터 흘러나와

Den Himmel beßrer Zeiten mir erschlossen, / 더 나은 세상의 천국을 열어주었습니다.

Du holde Kunst, ich danke dir dafür! / 그대 아름다운 예술이여, 그것에 감사합니다!

Friday, November 11, 2011

Cilea's "Adriana Lecouvreur"-Opera Orchestra New York

지난 6월 카우프만의 홈페이지에서 뉴욕에서 메트 오페라말고 또한번의 콘서트가 11월에 있다는 것을 알고서 작곡가고 작품이고 따지지 않고 바로 예매했던 공연을 화요일날 보고왔다. 상대는 안젤라 게오르규. 메트에서 해고되고서 뉴욕에서 보기 힘들어진 요즘시대 최고의 디바의 라이브 연주를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지난달에 이 오페라의 ROH의 공연(이때도 카우프만과 게오르규가 주연)을 영화관에서 보기도 했고, 무엇보다 요즘 학교에서 스승님과 공부 중인 작품이기도 해서 나름 의미가 깊은 공연이었다.

오페라를 무대배경, 의상 등이 완전히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하는 것이라 3시간에 달하는 공연이 혹시 지루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오페라 극장에서는 무대 보다 낮은 곳에 위치하는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콘서트 형식으로 바뀌면서 무대위로 올라오니 전반적인 소리가 훨씬 명료하고 크게 들렸다.

*뉴욕타임즈에 올리온 이날 공연 사진. 2막 공연이 끝난 후 게오르규는 흰색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왔다. 정말 여신 분위기였음. 
(뉴욕타임즈 Cr: Karsten Moran)

특히 CD나 오페라 버젼에서는 묻어가는 특정 악기의 솔로 선율이 수면위로 떠오른 것처럼 들렸다. 첼로 솔로, 오보에 솔로, 바이올린 솔로등이 그 예이다. 이외에도 솔로 기능이 아니라 할지라도 반주 또는 큰 합주의 일환으로 악기들이 연주할 때도 개별 악기들의 소리가 생생히 살아서 들렸다. 우아하고 감미롭게 다가오는 아르페지오 음형의 하프 선율, 코믹 또는 스윗한 장면에 등장했던 글록켄슈필의 울림, 극적인 긴장감 및 클라이막틱한 효과를 불러오는 여러 타악기 음향등이 시각적으로 바로 보임과 동시에 훨씬 직접적으로 감지되었다. 더불어 다양한 악기가 한 화음을 낼 때는 조화의 밸런스는 유지한 채 각 악기의 음색이 블렌딩 되는 것 또한 훨씬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비유를 하자면 마치 비빔밥을 먹는데, 각 재료가 어루러져 섞인 조화의 맛을 즐김과 동시에 각각의 시금치, 콩나물, 무생채, 고사리, 도라지, 김가루, 참기름, 달걀의 풍미가 개별적으로도 느껴지는 그런 것이었다. 오페라를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할 땐 완전히 연출된 오페라에서는 캐치하기 힘든 또다른 장점들(특히 오케스트라 사운드 관련)이 있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비록 무대장치도 없고, 의상도 연미복과 드레스를 입은 콘서트 형식이라 할지라도 성악가들은 다들 역할에 충실하게, 어마어마한 케미스트리를 뿜어내며 드라마적인 긴장감을 잘 이룩해내었다. 언제나 무대에서 맡은 캐릭터에 관한 진실된 해석을 보여주는 카우프만, 무슨 역할을 하든 자신감과 당당함이 넘치는 게오르규, 그외 조연진들(다소 우스꽝스러원던 수도원장, 듬직했던 미쇼네, 차가운 질투심으로 불타던 부와용 공작부인, 부산스러운 코믹함을 담당했던 코메디 프랑세즈 배우들 등) 누구하나 빠지는 사람없이 다들 완벽한 앙상블을 이루어냈다.

이날 공연에 영감받아서 분석한 작품이 바로 "L'anmia ho stanca"(제 영혼은 지쳤습니다)이다. 스승님이랑 같이 분석해보니 대략 15마디정도밖에 안되는 짧은 곡이지만 어마어마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었음. 극중 마우리치오 백작이, 질투심과 미련으로 불타고 있는 예전 연인인 부와용 공작부인에게 부르는 노래이다. 이미 떠나간 사랑인데 날 더이상 힘들게 하지 말라는...어찌보면 냉정한 내용이지만 선율 자체는 너무나도 처량하고 구슬프게 들린다.

*절절함이 느껴지는 요나스 카우프만의 해석. 
마치 우는것처럼 들린다 (Youtube Cr: operalover9901)

L'anima ho stanca, e la metae lontana / 제 영혼은 지쳤고, 그대는 저 멀리만 있습니다

non aggiungete la rampogna vana / 저에게 부질없는 책망을 하지 마십시오.

All'ansia che m'accora / 많은 괴로움이 제 마음을 이미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Assai vi debbo / 당신께 많은 빚을 졌습니다.

ma se amor vanisce, / 비록 사랑이 사라진다 할지라도

mèmore affetto in cor mi fiorirà / 아름다운 기억들은 내 마음 속에 피어날 것입니다.


Saturday, November 5, 2011

바그너의 "지그프리트"(Siegfried)-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지난 5월 14일날, 바그너 반지 중 두번째 파트인 "발퀴레"를 보고서 너무나도 감동받은 나머지 한동안 잠잘때 빼고는 계속 발퀴레 스토리와 선율만 생각 났었는데 오늘 드디어 그 다음편인 "지그프리트"를 보고왔다. 역시나... 음악적 완성도도 대단했고 무대 연출도 상상 이상으로 멋졌고 모든것이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좋았다.

*뉴욕타임즈의 "지그프리트" 리뷰에 올라온 스틸컷 (Cr: Sara Krulwich/The New York Times). 저 용은 획득한 황금 보물을 지키기 위해 자기 형제를 죽이고 용으로 변한 거인족인 파프너. 지그프리트의 칼을 맞고 저세상으로 간다. 마치 스필버그 감독 영화에 나오는 공룡같았다. 나쁜 역할인데 이 용은..의외로 귀여운 대머리 뱀 이미지ㅋㅋ 뉴욕타임즈에서도 "a huge, puppetlike thing with scaly skin, spiky teeth and glassy eyes: a little too cute."이라고 평하고 있다. 정말 cute한 용이었다.

오페라를 보는 내내 끊임없이 떠오르는 음악적, 드라마적 영감 놓치지 않기위해 휴식 시간동안은 준비해간 노트에 빠짐없이 아이디어를 적었는데, 그러다보니 쉬는시간 20-30분이 훌쩍 지나갔다. 오페라 중간중간 "발퀴레"에 나오는 인물들이 언급될 땐 그 비극적 죽음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고, 예전에 스토니브룩에서 "반지"주제로 했던 수업도 생각나고, 반지 시리즈 중 특히 "지그프리트"를 좋아하는 미국인 친구 생각도 나고, 요즘 한창 학교에서 오페라 공부에 열정을 불태우고 계신 윌리엄 스승님 생각도 나고, 바그너의 특이한 화성 어법 및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드라마에 대한 감각에 감탄하며 시간 가는줄 모르고 감상했다. 끝나니 5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반지 시리즈의 마지막편인 "신들의 황혼"은 도대체 얼마나 멋있게 펼쳐질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못견딜 지경이다.

"지그프리트"를 본 후 너무나도 많은 아이디어과 생각이 뒤죽박죽 되어있는 관계로 좀 더 생각을 정리한 후 자세한 리뷰는 다음번에 올리도록 할 생각이다.


Friday, November 4, 2011

The Music of Wotan's Entrance in Wagner's Ring Cycle

We can find particular 'majestic' and 'monumental' sound at Wotan's entrance (the chief god governing Valhalla) in the Ring Cycle:  the Prelude of Act 2 in "Walküre" and the Prelude of Act 3 in "Siegfried." Both preludes feature the stomping rhythm invoking military march and stentorian brass clang that effectively describe the chief god's ruling power and dignity.

Wagner had initially conceived Wotan as a protagonist in the tetrology with an happy ending, but he modified his idea, after experiencing Schopenhauer's pessimistic philosophy of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n 1856. In the final version of the Cycle, Wotan is given less dramatic emphasis than Siegfried who is the principal character doomed to death. For example, Wotan's final appearance is seen in Act 3 of "Siegfried" and he does not show up at all in the last installment "Götterdämmerung," although audiences must be curious about where Wotan is and what he is doing at the moment of Valhalla's collapse. He simply withdraws from the opera (or run away alone? No, no, it's not proper action for the king of the gods.) without leaving any clue to trace his trajectory.

However, the heroic and splendid music that Wagner wrote for the leader of the gods still vividly conveys Wotan's invincible force and mighty charisma. Indeed, I think the two Preludes are the most powerful and vibrant moments in the Cycle, a soundscape of masculine physicality.

In the linked clip below, Act 2 Prelude of "Walküre" starts first, then Act 3 Prelude of "Siegfried" comes at 2:18. The latter continues to Wotan's invocation of Erda (the primeval goddess of the earth).

*Wiener Philharmoniker under the baton of Goerg Solti; Hans Hotter as Wotan (Wanderer) in Act 3 of "Siegfried (Youtube Cr: mondolariano)

Thursday, November 3, 2011

Wagner's Siegfried-Metropolitan Opera

오늘 이메엘로 온 이번 토요일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공연할 바그너의 "Siegfried" 트레일러를 봤는데... 예고편 보고서 이렇게 떨린 적 처음이다. 이때까지 수많은 극장 HD 상영 트레일러를 봐왔지만 이렇게 미치도록 기대하게 하는 공연은 처음...언듯 본 무대 이미지 및 주인공들 분장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카리스마와 포스가 넘쳐났다. 얼른 악보랑 예전에 읽었던 지그프리트 관련 논문들 다시 제대로 한번 보고 가야겠다. 

 *메트에서 공식적으로 올린 트레일러. 신들의 왕인 Wotan이 3막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완전 포스와 카리스마가 넘쳐난다.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의 전주곡 멜로디가 군인들 행진을 상징하는 듯한 리듬을 타고 당당하고 힘차게 흘러간다. 역시 전쟁의 신의 등장에 어울리는 위엄있고 카리스마 있는 음악이다. 

Tuesday, November 1, 2011

Jonas Kaufmann-New York Recital Debut

일요일날 보고온 카우프만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리사이틀에 대한 리뷰가 뉴욕타임즈에 오늘 올라왔다.

http://www.nytimes.com/2011/11/01/arts/music/jonas-kaufmann-in-recital-at-the-metropolitan-opera-review.html?_r=1&scp=1&sq=jonas%20kaufmann&st=cse

이 평에 따르자면 전반적으로 좋았으니 가곡 연주에서 요하는 섬세한 표현력, 다양한 늬앙스와 색채는 부족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우프만 독창회에서 느꼈던 나의 생각과도 완전 일치한다. 강하거나 약하게, 크거나 작게와 같은 양 극단이 있다면 그 중간을 채워주는 입체적인 색깔이 다양하게 드러나야는데 하는 법. 특히 가곡은 오페라 속의 아리아와 비교해 무대 장치나 의상, 긴 흐름을 타고 가는 드라마적 스토리가  부재한다. 따라서 독창자 혼자서 텍스트와 음악을 풀어가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훨씬 더 고난이도의 표현력, 공감가는 해석, 섬세한 호흡조절, 다양한 다이나믹 등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카우프만은 여전히 잘 생겼고, 무대위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진정성이 절절히 느껴지지만 가곡 연주자로서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의 전달력은 다소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 이는 특히 프랑스 멜로디인 Duparc 가곡에 가서 더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가사의 몽롱하고, 부드럽고, 섬세한 프랑스어 사운드가 음악과 함께 섞여 마치 대기를 타고 두둥실 실려가는 느낌이 나야는데, 카우프만 목소리가 원래 무겁고 강하기 때문인지 프랑스어 사운드들이 다들 중력에 의해 땅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우프만이 부른 Richard Strauss 가곡들, 그중에서도 특히 "Morgen"(내일)은 너무너무 좋았다. 이날 들었던 노래들 중 최고의 연주력과 음색 컨트롤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 뉴욕 타임즈 리뷰에서도 "He floated Strauss’s “Morgen” with exquisite control"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곡은 지난학기 수업시간에 분석 그래프도 그리고, 곡이 너무너무 좋아서 피아노도 쳐보고, 카우프만 CD에서 주구장창 듣던 곡이라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피아노 다이나믹으로 소곤소곤 속삭이듯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선율을 긴 호흡의 유려한 프레이징으로 소화한 카우프만. 슈트라우스가 왜 이곡을 결혼선물로 작곡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해석이었다.

Richard Strauss, "Morgen" (Cr: operalover 9001)

준비한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마련한 무대인데, 뉴욕 청중들이 카우프만을 그대로 보내줄 리가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박수소리에 하나 둘씩 앵콜곡을 받아내기 시작하고, 기어이 다섯 곡이나 듣고서야 오늘의 독창자를 집에 보내주었다. 앵콜 다섯 곡 중에 네곡은 슈트라우스 곡이었다. 그 중 네번째 앵콜이 예전 학부 1학년때 성악과 친구 따라 강병운 선생님 클래스 들어가서 연주했었던 "Zueignung"(헌정) 이었다. 이 곡의 원래 제목인 "Habe Dank"(감사합니다)를 떠올리 듯, 청중들께 헌정한다는 마음을 담아서 연주하는 듯 했던 카우프만.

Richard Strauss, "Zueignung" (Cr: LaMaledizione)

마지막 앵콜곡은 레하르의 "Dein ist mein ganzes Herz"(내 모든 마음은 당신것입니다)이었다. 이날 카우프만을 보러 본 모든 청중들에게 전하는 말처럼 정성을 다해 부르던 모습...정말 잊을 수 없을 듯 하다. Klasse! Jonas Kaufmann ist der beste Sänger der Welt! 만약 뮌헨 있을 때 알았더라면 Bayerische Staatsoper, Herkulessaal, Gasteig 이든 매일매일 가서 들었을 거다. 카우프만의 뉴욕 공연은 빠지지 않고 무조건 가야지.

Franz Lehar, "Dein ist mein ganzes Herz" (Cr: fritz5157)



Sunday, October 23, 2011

Cliea's Adriana Lecouvreur-Royal Opera House London

아침에 로열 오페라 런던의 "Adriana Lecouvreur"를 보고왔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이어서 영화관에서 HD screening으로 쏘아주는 오페라 극장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고 있다. 나같은 opera buff들에게는 아주 바람직하고 좋은 현상인게, 비행기타고 일일이 날아가지 않아도 큰 화면으로 편하게 우리 동네에서 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ㅎㅎ

이 오페라는 19세기말, 20세기초 이탈리아 베리즈모(verismo: 사실주의, 현실주의) 계열로 분류되는 칠레아(Francesco Cilea)의 출세작이다. 칠레아는 푸치니랑 비슷한 분위기지만 화성에 있어서 다소 실험적인 면모가 보이며, 전반적으로 선율이 굉장히 섬세하면서 아름다운 편이다. 이번 로열 오페라 프로덕션에는 현재 왕성한 활동을 하는 테너 중 지존이라 생각하는 요나스 카우프만이 나오는지라 무조건 볼려고 했었다. 게다가 지난주에 학교에서 선생님이랑 같이 공부했던 아리아 "poveri fiori"(가련한 꽃들)가 바로 이 오페라에 실려있는지라 요나스님도 보고 공부하는 곡도 들을겸 겸사겸사 무척 기대를 했었다. 결과는...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공연 보고 난 후 든 생각은 DVD가 나온다면 얼른 사야지 하는 것. 다음에 오페라 수업을 하게 된다면 반드시 학생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다. 노래도 좋고, 연기도 좋고, 화면도 좋고 전반적으로 완성도가 아주 높은 편이다.

18세기의 코메디 프랑세즈를 배경으로 이 극단의 유명배우인 아드리아나와 연인인 작센의 마우리치오 백작, 백작을 연모하는 유부녀인 부와용 공작부인 이렇게 세명이 얽힌 삼각관계가 중심이다. 결국 이글거리던 질투심이 폭발한 공작 부인이 보낸, 독에 담근 제비꽃 향기를 맡고서 아드리아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 무대가 무대인만큼 18세기 프랑스 극단의 화려한 무대, 휘황찬란한 드레스와 보석들, 무대장식 등 여태까지 봤던 오페라 중 무대가 가장 호화로웠다. 극단이 중심인 만큼, 극작품과 관련된 내용도 많이 나왔다. 예를들어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 세 여신을 두고서 누가 제일 아름다운 지를 결정하는 "파리스의 심판"(Judgement of Paris-파리스가 결국 아프로디테(비너스)를 최고의 미로 결정하는 바람에 나머지 두 여신은 격노하게 되고, 결국은 트로이 전쟁을 불러오게 된다)은 무대 속 발레극으로 보여지며, 부와용 공작부인은 아드리아나에 대한 비꼼의 의미로 "버려진 아리아나"(Ariana abbandonata-몬테베르디의 소실된 오페라)를 언급하기도 하며, 아드리아나는 이에 대한 반격으로 "페드라"의 한 장면(아내가 자신의 불륜을 고백하는 장면)을 무대 위에서 낭송하기도 한다.

*독에 담겼던 제비꽃 향기를 맞고서 절망하는 아드리아나. 저 제비꽃은 원래 아드리아나가 마우리치오에게 준 건데, 마우리치오는 그걸 부와용 공작부인에게 줬다. 공작부인은 제비꽃을 독에 담근 후, 시들어버린 채로 상자에 담아 아드리아나에게 돌려보낸다. 마치 마우리치오가 보낸 것처럼 위장하고서는... 다 죽어버린 꽃을 보고서는 아드리아나는 모든 것이 끝났고 절망만이 남았다며 "가련한 꽃" 이 노래를 부르며, 불 속으로 꽃을 던져버린다. 

비쥬얼적인 면과 더불어 노래와 연기도 다들 최고. 카우프만도 너무너무 멋있게 백작 역할을 잘해주었다. 카우프만이 무대에서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 보면은 이 사람은 무대에서 살수 밖에 없게끔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모든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캐릭터 그 자체로 느껴지고 진정성이 넘쳐난다. 사실 마우리치오 캐릭터로만 봤을 때 약간 맘에 들지 않는 면이 많지만 카우프만이 워낙 멋있고 분위기가 좋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아드리아나를 맡은 안젤라 게오르규 또한 워낙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는지라 중간중간 아리아가 끝날때 마다 많은 박수를 받았다. 현실세계에서 최고의 디바로 일컬어지는 소프라노가 극 중에서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여배우 역할을 하니 딱맞는 옷을 입은 듯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카우프만과 게오르규는 이 오페라 외에도 평소에 팀을 이루어 같이 공연하는 일이 많은 만큼, 전반적으로 둘 사이의 호흡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우프만과 최고의 케미스트리를 보여주었던 소프라노는 바그너 "발퀴레"에서 카우프만과 연인으로 나왔던 Eva-Maria Westbroek이다. 둘은 그냥 연인 그자체로 보였다. 마치 "공주의 남자"에 승유와 세령이 같았다)

*마우리치오가 아드리아나에게 사랑의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 "Die Liebe macht mich zum Dichter"(사랑은 나로 하여금 시인이 되게 합니다-원래 이탈리아어인데 자막이 독일어다)

11월 8일날 카우프만과 게오르규가 뉴욕에서 이 오페라의 콘서트 버젼 공연을 할 예정이다. 6월달에 공연 소식을 알고서는 바로 예매를 했었다. 너무너무 기대된다. 오늘 봤던 로열 오페라만큼, 아니 그 이상의 케미스트리를 보여주길 바란다.



Friday, October 21, 2011

마리아 칼라스의 "La mamma morta"(어머니는 돌아가시고)와 영화 "필라델피아"

지난번 수업시간에 스승님과 어쩌다가 오페라의 세계에 접어들게 되었는지에 대해 얘기하던 중 마리아 칼라스를 주로 들으면서 오페라에 빠지게 되었다고 하셨다. 칼라스 목소리 자체는 "strange voice"임에 비해 노래에서 마성의 힘이 느껴진다고 그러시던데, 칼라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완전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이유는, 칼라스 목소리에서 가끔씩 감지되는 심한 wobble은 정말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목소리 자체도 텁텁한 편이고 그렇다고 테크닉이 카바예만큼 압도적으로 좋은편도 아니고. 칼라스의 전설적 명연이라 일컬어지는 벨리니의 "노르마"를 비롯해 유툽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클립들을 들어봤지만 이때까지 한번도 칼라스가 다른 성악가들에 비해 No.1으로 선택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 칼라스가 최고로 다가오는 유일한 아리아가 딱 하나가 있는데, 바로 조르다노(Umberto Giordano)의 "안드레아 셰니에"(Andrea Chenier) 중 "어머니는 돌아가시고"(La mamma morta)이다. 이 노래만큼은 칼라스가 최고다. 그의 다소 어두운 음색에서 울려퍼지는 처절하면서도 힘있는 표현력은, 연인의 정적의 마음을 돌려놓는 마달레나의 진심어린 마음을 너무나도 '정직'하게 보여준다. 인간적인 목소리의 호소력 있는 울림...적어도 이 노래에 관해서라면 칼라스말고 다른 성악가들은 차선에 머물 것 같다.


*이 아리아는 영화 "필라델피아"에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 극중 에이즈 환자인 톰 행크스가 변호사인 덴젤 워싱턴의 무심했던 마음을 여는 것은, 말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감정적 호소도 아닌 바로 이 아리아이다. 마치 오르페우스의 리라 연주가 지상과 지하세계를 일깨웠던 것처럼...칼라스의 목소리로 이 아리아가 들려지는 동안 음악에 완전히 몰입된 채 선율과 가사를 따라가는 톰 행크스를 본 후 변호사인 덴젤 워싱턴은 이 에이즈 환자에 대해 마침내 깊은 공감과 동화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Youtube Cr: toxicorangetunes)

프랑스 혁명의 날, 귀족의 딸이였던 마달레나는 엄마도 죽고 집도 불에타고 하녀 베르시와 함꼐 도망자 신세가 된다. 하룻밤만에 사회적 지위, 가족, 재산 모든 걸 잃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 마달레나집 하인의 아들이었던 제라르는 혁명당원이 되어, 반혁명분자로 찍혀버린 안드레아 셰니에(마달레나의 연인)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있다. 제라르는 주인댁 따님이었던 마달레나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삶의 저 벼랑 끝에 서있던 자신이 셰니에와의 사랑의 힘으로써 삶을 포기하지 않게 되었음을 이 아리아를 부르면서 보여준다. 마달레나의 호소력있는 노래에 감동받은 제라르는 그녀에 대한 마음을 결국은 접으며 셰니에를 도와주는 쪽으로 선회하게 된다(이 부분은 마치 바그너의 "발퀴레" 2막 4장인 브륀힐데와 지그문트 사이의  "Todesverkündigung"장면을 연상시킨다. 죽음을 선고하기 위해 지그문트를 찾아간 브륀힐데는 지글린데에 대한 지그문트의 죽음을 불사한 사랑에 감동받아 결국은 어버지인 보탄의 명령을 어기고서 지그문트의 편에 서게된다).

아리아의 초반부에선 마달레나가 얼마나 절망과 좌절의 상황에 있었는지를, 후반부에선 셰니에와의 사랑을 통해 이를 극복하였는지를 그린다.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는 그 전환지점에서 단선율의 첼로를 배경으로 칼라스의 목소리 라인이 D에서 D# (2:44 지점-어둡고 암담했던 단조에서 장조로의 모드 변화를 알리는 시그널)으로 넘어갈 땐 마치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서서히 내려오는 듯한 느낌이다. 극적인 변화를 이끄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이 반음 진행에 의해 나온다. BDF# 단화음에서 BD#F# 장화음으로 바뀌게 됨과 동시에, 음악 형식적으로도 레치타티브 및 서주역할의 Part1에서 보다 선율적이고 역동적인 리듬적의 Part2로 넘어가게 된다. 필라델피아 클립에 보면은 톰 행크스 또한 D에서 D#으로의 진행이 불러오는 음악적 의미(단조에서 장조로)와 가사 및 드라마의 의미(절망에서 희망으로)에 대해 깊이 느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 얼굴 표정과 온 몸의 제스쳐로 표현되고 있다. 아래의 가사는 희망을 그리는 후반부 내용.

[...]
che a me venne l'amor!
Voce piena d'armonia e dice
Vivi ancora! Io son la vita!
Ne' miei occhi è il tuo cielo!
Tu non sei sola!
Le lacrime tue io le raccolgo!
Io sto sul tuo cammino e ti sorreggo!
Sorridi e spera! Io son l'amore!
Tutto intorno è sangue e fango?
Io son divino! Io son l'oblio!
Io sono il dio che sovra il mondo
scendo da l'empireo, fa della terra un ciel! Ah!
Io son l'amore, io son l'amor, l'amor

당신은 반드시 사셔야 합니다, 저는 삶 그 자체입니다!
당신의 천국이 제 눈 속에 있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제가 그 눈물을 닦아드리겠습니다.
제가 당신과 함께 걸으며 버팀목이 되드릴 것입니다!
미소와 희망을 가지세요! 저는 사랑입니다!
피와 고통의 수렁에 빠져 계십니까?
저는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잊게 해드리겠습니다!
저는 세상을 구한 신입니다.
저는 하늘에서 내려와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 것입니다!
저는 사랑, 사랑, 사랑입니다!

*톰 행크스의 완전히 몰입한 명연기가 빛나는 장면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위에서 언급한 전반부에서 후반부로의 전환지점에서 밝은 조명이 갑자기 컴컴해지면서 벽난로의 이글거리는 붉은 불빛이 이를 대체한다. 마치 마달레나와 톰의 삶에 대한 의지의 불꽃이 솟아로오르는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와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 것"이라는 가사에 부합하듯 카메라 앵글 또한 위에서 내려보는 시선을 취하고 있다. 아리아는 처음에는 객관적 감상의 대상으로 들려졌지만 곡이 진행될수록 주인공 인물의 내면적, 주체적 목소리로서 승화된다. 이 영화의 감독, 촬영감독, 배우는 "La mamma morta"가 오페라의 어떤 상황에서 노래되는지, 아리아의 음악적 구조가 어떻게 가사와 부합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Youtube Cr: prussianblue0)


Tuesday, October 18, 2011

"공주의 남자"-영웅의 딜레마

오늘 목요일 수업때 다룰 아티클 읽다가 공주의 남자를 생각나게 하는 구절을 발견하였다. 바로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번뇌에 관한 것이다. 즉, 드라마나 희곡에서 영웅적인 캐릭터가 흔히 처하는 딜레마는 다음과 같다.

국가와 가문을 위한 희생 (대의명분) VS 실제 행복 추구 (개인적 )

공주의 남자에서 김승유는 정의(단종 복위 및 가문의 명예)를 위해 복수의 길과, 그런 위험한 레지스탕스같은 삶 내려놓고서 평범한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살고싶어하는 개인적인 바램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딜레마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고전의 한 구절을 Scott Burnham의 “Beethoven Hero”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다.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그 해석들 중 공통점은 영웅을 죽거나 살거나에 상관없이 승리자로 읽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러한 승리자가 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적들을 대항해 맹렬히 싸우다가 결국은 어렵게 어렵게 물리침으로써 승리자의 월계관을 쓸 수도 있으며(결국은 살아남는 결말), 둘째로 장렬히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영웅의 명예를 얻을 수도 있다(결국은 죽게되는 결말). 영웅에 대한 이 두 가지 시나리오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저자인 Burnham은 호머의 "일리아드" 중 아킬레스의 말을 인용한다.

In Marx’s interpretation, Napoleon can become Napoleon only through successful interaction with his troops. For Lenz, the hero must die in order to obtain eternal glory. This was the fatal transaction made explicit by Achilles in the Iliad: as he says in book9, lines 410-416: “I carry two sorts of destiny toward the day of my death. Either, if I stay here and fight beside the city of the Trojans, my return home is gone, but my glory [kléos] shall be everlasting; but if I return home to the beloved land of my fathers, the excellence of glory [kléos]is gone, but there will be a long life left for me, and my end in death will not come to me quickly.”
(quoted from Scott Burnham, Beethoven Hero, pp.19-20)

“내가 죽음의 운명을 맞이하는데는 두 가지 길이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트로이 성밖에 머물면서 계속해 싸운다면 결코 집에는 돌아 갈 수는 없을 것이나 나의 명예는 영원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나의 조국으로 돌아가버린다면 찬란한 명예는 잃어버릴 것이나, 당장 닥칠 죽음에 대한 걱정 없이 장수를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정의라는 이름을 위해 이 한몸 바칠 것인가, 아님 허울뿐인 명예를 버리고 실리를 취할 것인가? 대의명분이 걸린 명예와, 개인의 행복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는 영웅은 비단 아킬레스만이 아니다.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의 이스마엘레가 그렇고, 벨리니의 "노르마"의 타이틀 롤, 로시니의 오페라 "탄크레디" 중 탄크레디와 아메나이데, "공주의 남자"의 김승유까지 그런 갈등에 빠져 고뇌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은 동서고전 통틀어 한 둘이 아니다.

다시한번 공주의 남자 결말을 생각해본다면, 결코 양립될 수 없는 이 딜레마를 적절한 선에서 잘 조율한 것 같다. 김승유가 자의로 복수를 버렸다면 그는 가문을 저버린 불효자식임과 동시에, 끝까지 행동하는 충신으로 남길 포기한 겁쟁이(변절자는 아니더라도)가 되었을 것이다. 이리 되면은, 영웅으로 시작했지만 결말은 사랑에 눈이 멀어 도의며 집안을 저버린 찌질이의 감상적 사랑놀음(naive sentimentalism)으로 빠지게 된다. 반면에 대의명분을 짊어지고서 복수만 계속 추구하다 결국은 전사한다면 이때까지 집안까지 저버리고 헌신했던 세령이의 사랑 및 영웅의 험난했던 삶의 여정이 조금이나마 보상받기를 바라던 관객의 희망은 모두 물거품 된 채 남는 것 하나없이 냉소적 허무주의(cynic nihilism)로 끝나게 될 것이다. 즉, 승유의 캐릭터가 온전히 보존되기 위해선 사랑만 택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복수의 대의명분만을 추구해서도 안된다. 특히나, 해피엔딩(즉 승유와 세령이 함께 사는 결말)으로 끝날 것이라면 복수추구에서 개인의 행복 추구로 넘어가는 전환이 덜 무리하게, 덜 억지스럽게, 김승유라는 캐릭터가 이때까지 보여준 도덕성(효심 및 충정)과 따뜻한 인간애(세령이에 대한 사랑)에 최대한 스크래치가 덜 나게끔 이뤄져야한다. 여태까지 공주의 남자에서 설정된 두 축인 대의명분과 개인의 영달은 김승유에게 있어 이세상에서는 결코 양립될 수 없는 가치임을 너무나 잔인할 정도로 각인시켜주었기 때문에, 이 두 축을 거슬러 한 축에서 다른 한축으로의 이동은 드라마적, 캐릭터적인 면에서 상당한 부담을 동반하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작가들의 해결책은 이 둘을 어떻게든 중도에서 조율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복수를 완벽히 자의로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세령이와의 사랑도 지켜나가는 길. 이는 김승유의 "눈이 멀었음"을 통해 어느정도 가능해진다. 승유가 어느날 복수가 갑자기 하기 싫어서, 또는 세령이랑 그냥 살고 싫어서 복수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눈이 멀었기 때문에 복수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는, 복수 중단에 대한 외부적, 타자적인 요인을 설정함으로써, 대의명분의 추구에서 개인의 행복 추구로 넘어가는 변환이 어느정도 필연성을 가지며 그러한 극에서 극으로의 이동이 다소 덜 무리하게 느껴지는 효과를 나았다. 물론, 눈의 "잃음을 당했다"라는 점 때문에 완벽한 영웅으로서의 면모는 다소 희석된 점 또한 사실이다. 실제로, 결말에 등장한 김승유는 금상 위 좌상이었던 김종서의 막내 자제도 아니며, 문장과 글에 능하던 성균관의 지적인 학자도 아니며, 수양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반란군의 수장도 아닌, 그저 이름없는 일개 서민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김승유가 자의로 대의명분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겁쟁이"가 되버리는 무리수에 빠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행복도 잃지 않는 결말은, 결과적으로 영웅성이 약해졌다 할지라도 극단적인 두 가치를 주어진 상황 하에서 할수 있는 한 최대로 부드럽게(그래서 공감가고 설득력이 느껴지는) 중재한 것으로 보인다. 김승유는 끝까지 복수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그래서 옥사에서 세령이랑 아기까지 놓아두고선 죽으려고 했었다), 이제는 장님이 된버린 현실이 도저히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복수의 길을 포기한 것은 완전한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며, 개인의 영달 추구라는 결과는 복수포기(비록 타의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와 동시에 얻게되는 필연적인 선택이 되버린다.

확실히, 장님이라는 설정은 드라마 전반부에 보여줬던 잘생기고, 멋있고, 비쥬얼적인 면으로 압도했던 김승유와는 너무 대비된다. 하지만 그런 무리수의 설정을 통해서라도 해피엔딩을 이끌어낸 작가들은 아킬레스도 결코 결론 내릴 수 없었던 딜레마를,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으로 풀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어려운 난제를 최선으로 매듭지은 작가진께 박수를 보낸다.

Monday, October 10, 2011

"Making Infinity" - 이우환 특별전 (구겐하임 미술관)

"Making Infinity"
이우환 특별전-9월 17일, 구겐하임 미술관

그동안 가볼려고 맘먹었던 이우환 특별전을 보러갔다. 토욜 오후는 무료라 그런지 미술관 문앞부터 길게 줄이 늘어져있었지만 한 10정도 기다리자 바로 입장. 구겐하임은 여태까지 뉴욕에서 본 전시 중 가장 좋았던 전시인 칸딘스키 특별전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게 작년 1월인가 그랬으니 그때 이후 거의 1년 반만에 다시 가는게 된다.

구겐하임이 사실 미술관 건물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작품이다. 보통의 미술관들은 각 방들이 통로문을 통해 이어져 있는 반면 구겐하임은 나선형으로 한번에 쭉 이어진다. 특별히 계단을 오르내릴 일도 없고 공간에서 공간으로 움직인다는 "이동감"도 느껴지지 않느다. 그냥 선을 따라 쭉 걷다보면 다음 작품이 보이고, 그렇게 하다 어느새 1층에서 저 높은 꼭대기층까지 이르게 된다. 어떠한 단절도 없다. 이동하는 동안 하나의 시간이 선적으로 무한히 연장되고 확대되어 나아간다. 전시의 타이틀인 "Making Infinity"와 구겐하임의 공간구성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대목이다.


*동영상의 0:24 경에 나오는 장면-돌의 무게로 밑에 깔린 유리를 깨어 갈라지는 선을 만드는 장면. 처음 봤을 때는 어떻게 무엇으로 저 형태의 유리선이 만들어졌을까 궁금했었다.

아래는 뉴욕타임즈에 실린 리뷰. 이 리뷰의 타이틀처럼 전시는 상당히 철학적이다. 마치 시각으로 표현된 철학 책의 한 챕터를 읽은 느낌이다. 사실 이 전시를 보는 동안, 작품 자체가 주는 비쥬얼적인 효과보다는 오히려 그 작품의 존재가 던지는 메세지 자체가 더 크게 다가왔다. 조그만 점이 모여 선이되고, 이 선은 다시 면을 이루고 그 면은 궁극에 주위 배경과 완전히 합일이 되어 사물과 배경의 구분조차 초월하게 된다. 선과 색은 미니멀리스트 계열답게 간단하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화두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존재함은 무엇인지? 눈에 보이는 현상(phenomenon as opposed to noumenon)은 과연 본질일까?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감상자에게 실존철학, 현상학에 관련된 의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었다.

http://www.nytimes.com/2011/06/24/arts/design/lee-ufan-marking-infinity-at-the-guggenheim-review.html?scp=1&sq=ufan%20lee&st=cse


"공주의 남자" 결말에 부쳐

"공주의 남자"가 지난 6일날로 끝이났다. 7월달 첫 1회부터 시작해서 시차때문에 수목 아침마다 떨리는 손으로 기다리던 24부작. 나이아가라 여행중에도 그 버벅거리던 인터넷을 붙잡고 계유정난을 그리던 에피소드를 끝까지 보고자 바둥거리던 것, 호텔 체크인 할때마다 오로지 드라마에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확인하고자 데스크 가서 인터넷 연결 아이디와 비번을 매번 물어보던 게 엊그제 같은데...역시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는 법이다.

6일날 수업마치고 아는 선배랑 밤 늦게까지 차마시고 놀다가 밤 한 10시부터 23, 24회를 보기 시작했다. 그 전날인 수요일은 학교 수업이 늦게까지 있었던데다 마치고 오페라 보러 갔기때문에 도저히 23회를 볼 시간이 없었다. 아무튼 마지막 두편 시청을 끝내니 밤 12-1시쯤이었다. 이때부터 쏟아지는 폭풍 눈물ㅠㅠ

목요일 오전에 수업시간 중간에 너무나도 결말이 궁금한 나머지 네이버 검색으로 결말이 해피엔딩이라는 점만 간단히 숙지했음에도 불구, 눈 앞에 실제로 펼쳐진 결말은 마냥 룰루랄라 좋고 쾌활하지만은 않은, 뭔가 아련하고 아쉽고 안타깝고 그러면서 다행이기도 한 여러가지 감정과 정서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마지막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오페라와 드라마(주로 사극)을 봐왔지만 해피엔딩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을 안겨다주는 작품은 정말 처음이다...


*이 장면부터 시작해 본격적으로 꺼이꺼이 통곡하기 시작...김승유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그동안 자신과 수양 사이에서 승유가 얼마나 괴로웠을 것을 이해하는 세령이기에 같이 떠나자는 말조차도 하지 않겠다고 할 땐 정말 가슴치며 울었다...ㅠㅠㅠ

문제는 왜 그렇게 결말을 읽었냐인데...해피인데 왜 그리 끊임없이 눈물이 나고, 마음이 아픈지... 밤을 하얗게 새버렸다. 아침 8시까지 엔딩의 여운과 흐르는 눈물땜에 잠도 못자고, 3시간 자고 선배 만나러 학교 갔다. 마치 5월 14일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바그너 "발퀴레"를 보고 충격 받아서 잠 못자고 텍스트 읽고, 예전에 읽었던 논문 다시 꺼내 울면서 읽고, 음악 주구장창 들으며 밤을 새웠던 것과 비슷한 현상. 따라서 본 글은 어쨌든 해피엔딩으로 끝난 "공주의 남자"가 그 행복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왜 가슴아픈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 어찌보면 완전한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다는 단상들에 대한 것이다.

계유정난 이후 김승유가 복수심으로 불타며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폭주할때 속으로는 제발 저 짐을 내려놓길 바랬었다. 이개 스승님도 죽은 줄 알았던 제자를 만났을 때, 복수의 칼날을 버리고 인간답게 사는 길을 가길 원한다는그런말을 했던거 같다. 죽은이들이 못다이룬 복수의 대업을 모두 떠안고서 실패일지 성공일지 모를 결말-하지만 역사적 사실도 그렇고 극중 상황도 그렇고 실패임을 모두 직감하는 듯 했다-을 향해 마치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뛰어드는 김승유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괴로웠다. 그렇게 뒤도 안돌아보고서 복수의 길을 걷는 것이 순전히 자기 의지라면 덜 괴로웠을텐데, 대의명분을 위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이 김승유 자신의 진솔한 의지와는 반하는 것이기에 더 보기가 힘들었다. 결국엔 수양과 단둘이 대면했을 때 김승유가, 죽어도 상관 없다고, 내가 실패하면 다른 사람이 또 일어날거고, 그 사람이 실패하면 다른 사람이 또 대신해 일을 도모할거라는 말하는 것을 보며 저 인간은 결코 자기가 먼저 나서서 대의를 포기하는 일은 없겠구나라는 걸 확인하며, 복수의 짐을 내려놓는 것은 불가능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막판 반전에는 마침내 그 짐을 자의든 타의든 내려놓고 눈이 멀어버린 김승유가 등장한다. 그동안 김승유의 어깨에 걸린 짐이 얼마나 무겁고 숨조차 쉬지 못하게 할만큼 존재를 짓누르던 것임을 알기에 차라리 한쪽 눈을 잃었을지라도 마음의 평안을 찾은 것은 너무나도 다행스럽고 관객으로서 바라던 바가 이뤄진 순간이었다. 이개 스승님, 조석주, 나, 그리고 수많이 관객들이 바라던 바가 바로 고통받는 주인공의 마음의 평안, 나아가 정신적 구원이 아니었던가. 지하에 계신 종서 아버님조차도 아들이 가문의 복수를 위해 자폭의 길을 걷기보다는 행복과 평안의 삶을 가지길 바랬을 것이다.



*마지막 반전: 내려놓지 못했던 짐을 결국은 버리고서 마음의 평안을 되찾은 승유. 베르길리우스의 "에네이드"에 보면 이런말이 나온다 "도대체 어떤 운명이 너를 기다리고 있길래 그토록 많은 고통과 아픔이 따르는가." 거듭된 실패 이후 예정된 운명은 처절한 죽음 뿐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사랑하는 여인과 부부의 연을 맺고서 행복하게 잘 사는 운명이 김승유를 기다리고 있었다...비록 눈을 가져갔을지라도 말이다. 

막판에 김승유의 눈이 멀어버렸다는 사실은 그러나 당혹스럽게 다가왔다. 물론 눈이 먼다는 것은 감각을 초월해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것을 상징하는 메타포로서, 문학작품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다소 클리셰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예를들어 자신의 과오를 알게된 오이디푸스 왕은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는데 이는 죄업에 대한 속죄이자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겠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왕과 김승유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승유의 경우 자의가 아닌 타의로 눈을 잃었다는 점이다. 자신 스스로 감각의 세상을 초월하고자 눈을 찌른것이 아니라, 타인의 손에 의해 눈의 "잃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불러올 다음의 두가지 의미를 생각할 때 관객들에게 너무나도 큰 아쉬움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첫번째로, 이미지와 모습에 관한 것이다. 김승유는 계유정난 이전의 소위 엄친아이자 지적인 학자의 모습도, 계유정난 이후 "의"를 추구하는 반란군 수장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평범한 필부의 모습이다. 사회적인 명예, 지위, 의리와 충성심 등의 단어는 더이상 그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들이 아니다. 복수를 내려놓음으로서 뭔가 초탈한 듯 보였지만 그것이 완전한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리 된듯한, 뭔가 아쉽고 허한 느낌을 주는 그런 모습이었다(영어에서 "abnegation"이라는 단어가 가진 늬앙스와 비슷). 결말에 등장한 김승유의 모습이 단순히 초월적 모습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세령이와 같이 있으면서 김승유가 마지막에 직접 한 말, "눈을 잃은 대신 마음을 되찾았고, 복수를 잃은 대신 그대를 얻었다"는 말은 실명이라는 사실에 슬퍼할 모든이들에게 조그마한 위로를 전한다. 눈을 잃음으로써 승유와 세령은 그동안 그들을 옭아매던 허울뿐인 이름 대신 둘만이 허용된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함"을 얻으며, 현상이 아닌 "실제"를 보게되며(그동안 김승유는 얼마나 against-ridden character였던가!), 명분대신 "실리"를(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눈 먼 사람이 어떻게 계속 복수에 정진하겠는가) 선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같이 떠나자던 세령에게 어딜가든 수양의 세상이라며(즉,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건 수양의 세상이란 뜻) 그 간청을 뿌리치던 승유는, 마지막 회에서 바로 옆에 수양이 탄 가마가 지나감에도 보지 못하고 딸아이 손을 잡고서 유유히 걸어가던 모습과 절묘하게 대비된다. 눈을 잃었음이, 신체적 불편이 아닌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상징함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의명분과 복수추구에서 보여지던 영웅의 모습, 치열한 감정, 죽음을 불사하려던 용기는, 김승유가 결국엔 마음을 평화를 얻기위해서 버려진 가치들이기에 다소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두번째로, 이는 "실제적" 문제에 관한 것이다. 장님이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단순히 복수를 내려놓은, 정신적으로 뭔가 초탈한 모습이라는 점 이상의 실질적인 신체적 결함과 장애를 시사한다. 장님이 되버린 김승유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세령이나 딸아이 없이는 밖에 돌아다니기도 힘들 것이고, 그렇다고 집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고, 농사를 짓는것도 힘들 것이다. 장님이기에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 없이는 생존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장님이 되 것은 수양에 대한 복수를 멈추게 하기 위한 필연적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잃어버린 눈은 세령이를 보고 지켜줬었고 또 딸아이도 볼 수 있을 뻔 한 눈이기도 하다. 필부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장님까지 되버린 김승유...드라마 초반에 봤었던 엄친아로서의 면모와는 180도 다른 모습은 너무나도 급격한 반전이었다. 앞을 못보는 김승유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혹시라도 딸은 결혼해버리고 세령이가 먼저 죽는다면 혼자 어떻게 살까하는 걱정까지 되었다.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제한적일것이고, 앞으로 모든 걸 부인과 딸에 의지해 살아가야할 김승유를 생각하니 너무 안되보였다. 복수를 중단시키는 장치 치고는 너무 잔인해보였다.

결말에 대한 이 혼란스럽고도 복잡미묘한 감정은, 전반적으로 해피엔딩이지만 김승유가 장님이라는 사실이 불러오는 안타까움, 연민이 불러오는 슬픈 정서 때문인 거 같다. 물론 눈을 잃고서 얻은 사랑, 가족, 심적인 고요는 정난이후 김승유가 결코 닿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이상향의 세계이기에 더없이 아름답고 숭고하다.  언젠가 조석주가 모든 걸 잊고서 세령이 데리고 도망가서 자식낳고 살아라고 했을 때 승유가 "다 잊고 산다...참으로 꿈결같은 얘기로다."라고 읊조렸던 것처럼 마치 꿈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실제 현실로 펼쳐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승유가 실명했다는 사실은 특히 드라마 초반에 보여줬던 멋있고 매력적인 미남 도령이었던 모습과 대비해 무척이나 안타깝고 아프게 느껴진다. 더불어 사랑하는 부인 얼굴도, 귀여운 딸아이 얼굴도 더이상 못본다는 사실은, 그동안 김승유가 겪었던 생사를 넘나들던 고난과 고통을 생각할 때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이다.

어쨌든, 드라마의 결말은 주인공에게 불가능해 보이던 꿈을 이루어주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꿈은 단순히 우연적인 것에 의해 손쉽게 그리고 완벽히 쟁취된 것은 아니며, 처절한 댓가와 맞바꾼 결과이다. 특히 김승유의 경우 이름과 가족을 잃으며 여태까지 처절하게 겪은 심적, 신체적 고통을 다 겪고 난 후 심지어 눈까지 멀어지며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간신히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꿈을 이루기까지의 여정이 눈물나도록 고통스러웠고 절박했다. 그리고 목숨을 건지고서 김승유와 세령이가 같이 사는 모습 또한 관객이 여태까지 봐왔던 양반 도령과 귀한 공주가 살아가는 럭셔리한 삶의 이미지는 확실히 아니었다. 물론 비단옷 입고 꽃신 신고 하인들 부리며 대궐같은 99칸 기와집에서 살지 않더라도 둘 사이의 신뢰와 사랑은 이 세상 어느 부부보다 단단하고 깊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꿈같은 곳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 및 그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이 마냥 좋아라 하기엔 여태까지 겪으며 잃어버린 가치들이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너무나도 큰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면 여전히 맘이 헛헛하고 아련함이 밀려온다.

다소 클리셰적인 면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눈을 잃은 김승유가 그저 안타깝고 불쌍하게만 보지 않아도 될 것같은 위안을 주는 한 구절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4막1장에서 장님이 된 글로체스터의 대사이다. 비록 부귀영화와 사회적 지위를 잃었다 할지라도, 그리고 무엇보다 눈을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이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의미와 해석도 가능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I stumbled down when I saw: full oft’ tis seen, 
Our means secure us, and our mere defects
Prove our commodities.
눈이 보였을 때는 넘어지기도 했지;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
편리한 수단은 우리를 방심하게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오히려 우리는 강해지지.   

Wednesday, September 28, 2011

A Fish Singer- Montserrat Caballé


I call certain classical singers "fish," who have an extraordinary singing technique: they hold a note for an extremely long time without breathing. They would be able to live without breathing like a fish,* so I call them “fish.” I don’t know how this technique works. Perhaps, they mastered a magical skill of pulmonary or abdominal respiration. Or it's just a matter of talent given by God. Whatever it is, singing of fish singers always brings awe and amazement through their superb breath control. One name comes to my mind first: the legendary Montserrat Caballé is one of the best fish in the group. She is mainly known as a bel canto diva but also a great interpreter of Puccini and verismo.

There are countless Youtube clips that give you a glimpse of how this fish singer shows off her brilliant “fish” technique. “Poveri Fiori”(Poor Flowers) from Cilea’s “Adriana Lecouvreur” is one of her best renditions that you enjoy. The text describes Adriana’s pain, sorrow, and despair, as she believes that her lover sent back the faded violets to her, which she had given him before. Here, Caballé’s long and soft legato line exquisitely carries despondent feelings of the heroine’s broken heart. Her singing is really speechless.

I can't but admire and worship this fish singer.   



*Of course, fish is a gill-breathing animal. Yet in this article I use “fish” as a metaphorical meaning because they don't seem to breathe underwater.

Friday, September 16, 2011

푸치니, "O mio babbino caro"(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O mio babbino caro" from Puccini's "Gianni Schicchi"

푸치니의 오페라, "쟈니 스키키" 로레타의 아리아이다. 오페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전형적인 희극이다. 극 중 이 아리아는 로레타가 아버지인 스키키에게 사랑하는 남자친구와의 결혼을 허락 해달라 간청하며, 만약 허락 안해줄 경우 베키오 다리 위에서 아르노 (피렌체를 무대로 )으로 뛰어들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장면이다. 가사만 본다면 다소 과격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워낙 선율이 아름다고 시적이기 때문에 결혼식 축가로도 자주 쓰이는 .

어제 페이스북에 올라온 Royal Opera House London 이번 시즌 극장 상연 예고 클립에 안젤라 게오르규가 부르는 아리아가 배경음악으로 나왔다. 평소 게오르규 목소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편집된 오페라와 발레 영상, ROH "world class" 이미지, 그리고 게오르규의 호소력 있는 가창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몽환적이고도 고급스런 분위기를 실어나르고 있었다. 완전히 홀린 채 이 동영상만 한 50번은 돌려본 거 같다. 고백컨데 아리아가 이처럼 아름답고, 숭고하고, 절절하게 들린 적은 정말 처음이다. 아래는 바로 ROH 동영상.

  

이 노래는 아버지에게 결혼시켜달라 간청하는 장면이라는 것만 대충 알았던지라, 구체적인 텍스트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원어 텍스트를 찬찬히 뜯어보니 간청이라기 보다는 거의 협박에 가깝긴 하지만 다소 귀엽게 보이기도 한다.
  
O mio babbino caro, / ,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mi piace, è bello, bello. / 그를 사랑해요. 그는 정말 멋지고도 멋진 사람이에요.
Vo'andare in Porta Rossa / 포르타 로사로 가서
a comperar l'anello! / 반지를 사려고 해요!

Sì, sì, ci voglio andare! / , 정말로 갈거에요!
e se l'amassi indarno, / 만약 사랑이 허락될 없다면
andrei sul Ponte Vecchio, / 차라리 베키오 다리로
ma per buttarmi in Arno! / 그곳에서 아르노 강으로 뛰어들겠어요!

Mi struggo e mi tormento! /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요!
O Dio, vorrei morir! / 신이시여, 차라리 죽겠습니다!
Babbo, pietà, pietà! / 제발  가련히 여겨 주세요!
Babbo, pietà, pietà! / 가련히 여겨 주세요!

아련한 선율, 감성을 자극하는 가사... 푸치니를 좋아하지 않을  없는 이유이다. 바그너의 음악은 항상 음악 자체도 좋지만, 음악 넘어의 보다 본질적이고 초월적인 메세지를 찾게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푸치니의 음악은 마음에 바로 느껴지는 아름다운 선율 그 자체로서 우리를 끌어당기고 울린다. 그런면에서, 바그너를 듣는 방식은 플라톤적인 반면 푸치니를 듣는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듣는 음악이 바로 푸치니다.
  
아래는 안젤라 게오르규가 링컨 센터에서 라이브 공연한 . 어제밤 ROH클립 이후 유툽에 올라온 레코딩 여러개 찾아봤는데, 역시 게오르규 녹음이 음색과 표현력 면에서 최고인 하다. 차분하면서도 열정적이고,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게 파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