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October 18, 2011

"공주의 남자"-영웅의 딜레마

오늘 목요일 수업때 다룰 아티클 읽다가 공주의 남자를 생각나게 하는 구절을 발견하였다. 바로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번뇌에 관한 것이다. 즉, 드라마나 희곡에서 영웅적인 캐릭터가 흔히 처하는 딜레마는 다음과 같다.

국가와 가문을 위한 희생 (대의명분) VS 실제 행복 추구 (개인적 )

공주의 남자에서 김승유는 정의(단종 복위 및 가문의 명예)를 위해 복수의 길과, 그런 위험한 레지스탕스같은 삶 내려놓고서 평범한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살고싶어하는 개인적인 바램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딜레마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고전의 한 구절을 Scott Burnham의 “Beethoven Hero”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다.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그 해석들 중 공통점은 영웅을 죽거나 살거나에 상관없이 승리자로 읽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러한 승리자가 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적들을 대항해 맹렬히 싸우다가 결국은 어렵게 어렵게 물리침으로써 승리자의 월계관을 쓸 수도 있으며(결국은 살아남는 결말), 둘째로 장렬히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영웅의 명예를 얻을 수도 있다(결국은 죽게되는 결말). 영웅에 대한 이 두 가지 시나리오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저자인 Burnham은 호머의 "일리아드" 중 아킬레스의 말을 인용한다.

In Marx’s interpretation, Napoleon can become Napoleon only through successful interaction with his troops. For Lenz, the hero must die in order to obtain eternal glory. This was the fatal transaction made explicit by Achilles in the Iliad: as he says in book9, lines 410-416: “I carry two sorts of destiny toward the day of my death. Either, if I stay here and fight beside the city of the Trojans, my return home is gone, but my glory [kléos] shall be everlasting; but if I return home to the beloved land of my fathers, the excellence of glory [kléos]is gone, but there will be a long life left for me, and my end in death will not come to me quickly.”
(quoted from Scott Burnham, Beethoven Hero, pp.19-20)

“내가 죽음의 운명을 맞이하는데는 두 가지 길이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트로이 성밖에 머물면서 계속해 싸운다면 결코 집에는 돌아 갈 수는 없을 것이나 나의 명예는 영원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나의 조국으로 돌아가버린다면 찬란한 명예는 잃어버릴 것이나, 당장 닥칠 죽음에 대한 걱정 없이 장수를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정의라는 이름을 위해 이 한몸 바칠 것인가, 아님 허울뿐인 명예를 버리고 실리를 취할 것인가? 대의명분이 걸린 명예와, 개인의 행복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는 영웅은 비단 아킬레스만이 아니다.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의 이스마엘레가 그렇고, 벨리니의 "노르마"의 타이틀 롤, 로시니의 오페라 "탄크레디" 중 탄크레디와 아메나이데, "공주의 남자"의 김승유까지 그런 갈등에 빠져 고뇌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은 동서고전 통틀어 한 둘이 아니다.

다시한번 공주의 남자 결말을 생각해본다면, 결코 양립될 수 없는 이 딜레마를 적절한 선에서 잘 조율한 것 같다. 김승유가 자의로 복수를 버렸다면 그는 가문을 저버린 불효자식임과 동시에, 끝까지 행동하는 충신으로 남길 포기한 겁쟁이(변절자는 아니더라도)가 되었을 것이다. 이리 되면은, 영웅으로 시작했지만 결말은 사랑에 눈이 멀어 도의며 집안을 저버린 찌질이의 감상적 사랑놀음(naive sentimentalism)으로 빠지게 된다. 반면에 대의명분을 짊어지고서 복수만 계속 추구하다 결국은 전사한다면 이때까지 집안까지 저버리고 헌신했던 세령이의 사랑 및 영웅의 험난했던 삶의 여정이 조금이나마 보상받기를 바라던 관객의 희망은 모두 물거품 된 채 남는 것 하나없이 냉소적 허무주의(cynic nihilism)로 끝나게 될 것이다. 즉, 승유의 캐릭터가 온전히 보존되기 위해선 사랑만 택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복수의 대의명분만을 추구해서도 안된다. 특히나, 해피엔딩(즉 승유와 세령이 함께 사는 결말)으로 끝날 것이라면 복수추구에서 개인의 행복 추구로 넘어가는 전환이 덜 무리하게, 덜 억지스럽게, 김승유라는 캐릭터가 이때까지 보여준 도덕성(효심 및 충정)과 따뜻한 인간애(세령이에 대한 사랑)에 최대한 스크래치가 덜 나게끔 이뤄져야한다. 여태까지 공주의 남자에서 설정된 두 축인 대의명분과 개인의 영달은 김승유에게 있어 이세상에서는 결코 양립될 수 없는 가치임을 너무나 잔인할 정도로 각인시켜주었기 때문에, 이 두 축을 거슬러 한 축에서 다른 한축으로의 이동은 드라마적, 캐릭터적인 면에서 상당한 부담을 동반하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작가들의 해결책은 이 둘을 어떻게든 중도에서 조율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복수를 완벽히 자의로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세령이와의 사랑도 지켜나가는 길. 이는 김승유의 "눈이 멀었음"을 통해 어느정도 가능해진다. 승유가 어느날 복수가 갑자기 하기 싫어서, 또는 세령이랑 그냥 살고 싫어서 복수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눈이 멀었기 때문에 복수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는, 복수 중단에 대한 외부적, 타자적인 요인을 설정함으로써, 대의명분의 추구에서 개인의 행복 추구로 넘어가는 변환이 어느정도 필연성을 가지며 그러한 극에서 극으로의 이동이 다소 덜 무리하게 느껴지는 효과를 나았다. 물론, 눈의 "잃음을 당했다"라는 점 때문에 완벽한 영웅으로서의 면모는 다소 희석된 점 또한 사실이다. 실제로, 결말에 등장한 김승유는 금상 위 좌상이었던 김종서의 막내 자제도 아니며, 문장과 글에 능하던 성균관의 지적인 학자도 아니며, 수양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반란군의 수장도 아닌, 그저 이름없는 일개 서민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김승유가 자의로 대의명분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겁쟁이"가 되버리는 무리수에 빠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행복도 잃지 않는 결말은, 결과적으로 영웅성이 약해졌다 할지라도 극단적인 두 가치를 주어진 상황 하에서 할수 있는 한 최대로 부드럽게(그래서 공감가고 설득력이 느껴지는) 중재한 것으로 보인다. 김승유는 끝까지 복수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그래서 옥사에서 세령이랑 아기까지 놓아두고선 죽으려고 했었다), 이제는 장님이 된버린 현실이 도저히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복수의 길을 포기한 것은 완전한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며, 개인의 영달 추구라는 결과는 복수포기(비록 타의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와 동시에 얻게되는 필연적인 선택이 되버린다.

확실히, 장님이라는 설정은 드라마 전반부에 보여줬던 잘생기고, 멋있고, 비쥬얼적인 면으로 압도했던 김승유와는 너무 대비된다. 하지만 그런 무리수의 설정을 통해서라도 해피엔딩을 이끌어낸 작가들은 아킬레스도 결코 결론 내릴 수 없었던 딜레마를,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으로 풀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어려운 난제를 최선으로 매듭지은 작가진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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