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October 10, 2011

"공주의 남자" 결말에 부쳐

"공주의 남자"가 지난 6일날로 끝이났다. 7월달 첫 1회부터 시작해서 시차때문에 수목 아침마다 떨리는 손으로 기다리던 24부작. 나이아가라 여행중에도 그 버벅거리던 인터넷을 붙잡고 계유정난을 그리던 에피소드를 끝까지 보고자 바둥거리던 것, 호텔 체크인 할때마다 오로지 드라마에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확인하고자 데스크 가서 인터넷 연결 아이디와 비번을 매번 물어보던 게 엊그제 같은데...역시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는 법이다.

6일날 수업마치고 아는 선배랑 밤 늦게까지 차마시고 놀다가 밤 한 10시부터 23, 24회를 보기 시작했다. 그 전날인 수요일은 학교 수업이 늦게까지 있었던데다 마치고 오페라 보러 갔기때문에 도저히 23회를 볼 시간이 없었다. 아무튼 마지막 두편 시청을 끝내니 밤 12-1시쯤이었다. 이때부터 쏟아지는 폭풍 눈물ㅠㅠ

목요일 오전에 수업시간 중간에 너무나도 결말이 궁금한 나머지 네이버 검색으로 결말이 해피엔딩이라는 점만 간단히 숙지했음에도 불구, 눈 앞에 실제로 펼쳐진 결말은 마냥 룰루랄라 좋고 쾌활하지만은 않은, 뭔가 아련하고 아쉽고 안타깝고 그러면서 다행이기도 한 여러가지 감정과 정서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마지막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오페라와 드라마(주로 사극)을 봐왔지만 해피엔딩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을 안겨다주는 작품은 정말 처음이다...


*이 장면부터 시작해 본격적으로 꺼이꺼이 통곡하기 시작...김승유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그동안 자신과 수양 사이에서 승유가 얼마나 괴로웠을 것을 이해하는 세령이기에 같이 떠나자는 말조차도 하지 않겠다고 할 땐 정말 가슴치며 울었다...ㅠㅠㅠ

문제는 왜 그렇게 결말을 읽었냐인데...해피인데 왜 그리 끊임없이 눈물이 나고, 마음이 아픈지... 밤을 하얗게 새버렸다. 아침 8시까지 엔딩의 여운과 흐르는 눈물땜에 잠도 못자고, 3시간 자고 선배 만나러 학교 갔다. 마치 5월 14일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바그너 "발퀴레"를 보고 충격 받아서 잠 못자고 텍스트 읽고, 예전에 읽었던 논문 다시 꺼내 울면서 읽고, 음악 주구장창 들으며 밤을 새웠던 것과 비슷한 현상. 따라서 본 글은 어쨌든 해피엔딩으로 끝난 "공주의 남자"가 그 행복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왜 가슴아픈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 어찌보면 완전한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다는 단상들에 대한 것이다.

계유정난 이후 김승유가 복수심으로 불타며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폭주할때 속으로는 제발 저 짐을 내려놓길 바랬었다. 이개 스승님도 죽은 줄 알았던 제자를 만났을 때, 복수의 칼날을 버리고 인간답게 사는 길을 가길 원한다는그런말을 했던거 같다. 죽은이들이 못다이룬 복수의 대업을 모두 떠안고서 실패일지 성공일지 모를 결말-하지만 역사적 사실도 그렇고 극중 상황도 그렇고 실패임을 모두 직감하는 듯 했다-을 향해 마치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뛰어드는 김승유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괴로웠다. 그렇게 뒤도 안돌아보고서 복수의 길을 걷는 것이 순전히 자기 의지라면 덜 괴로웠을텐데, 대의명분을 위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이 김승유 자신의 진솔한 의지와는 반하는 것이기에 더 보기가 힘들었다. 결국엔 수양과 단둘이 대면했을 때 김승유가, 죽어도 상관 없다고, 내가 실패하면 다른 사람이 또 일어날거고, 그 사람이 실패하면 다른 사람이 또 대신해 일을 도모할거라는 말하는 것을 보며 저 인간은 결코 자기가 먼저 나서서 대의를 포기하는 일은 없겠구나라는 걸 확인하며, 복수의 짐을 내려놓는 것은 불가능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막판 반전에는 마침내 그 짐을 자의든 타의든 내려놓고 눈이 멀어버린 김승유가 등장한다. 그동안 김승유의 어깨에 걸린 짐이 얼마나 무겁고 숨조차 쉬지 못하게 할만큼 존재를 짓누르던 것임을 알기에 차라리 한쪽 눈을 잃었을지라도 마음의 평안을 찾은 것은 너무나도 다행스럽고 관객으로서 바라던 바가 이뤄진 순간이었다. 이개 스승님, 조석주, 나, 그리고 수많이 관객들이 바라던 바가 바로 고통받는 주인공의 마음의 평안, 나아가 정신적 구원이 아니었던가. 지하에 계신 종서 아버님조차도 아들이 가문의 복수를 위해 자폭의 길을 걷기보다는 행복과 평안의 삶을 가지길 바랬을 것이다.



*마지막 반전: 내려놓지 못했던 짐을 결국은 버리고서 마음의 평안을 되찾은 승유. 베르길리우스의 "에네이드"에 보면 이런말이 나온다 "도대체 어떤 운명이 너를 기다리고 있길래 그토록 많은 고통과 아픔이 따르는가." 거듭된 실패 이후 예정된 운명은 처절한 죽음 뿐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사랑하는 여인과 부부의 연을 맺고서 행복하게 잘 사는 운명이 김승유를 기다리고 있었다...비록 눈을 가져갔을지라도 말이다. 

막판에 김승유의 눈이 멀어버렸다는 사실은 그러나 당혹스럽게 다가왔다. 물론 눈이 먼다는 것은 감각을 초월해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것을 상징하는 메타포로서, 문학작품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다소 클리셰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예를들어 자신의 과오를 알게된 오이디푸스 왕은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는데 이는 죄업에 대한 속죄이자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겠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왕과 김승유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승유의 경우 자의가 아닌 타의로 눈을 잃었다는 점이다. 자신 스스로 감각의 세상을 초월하고자 눈을 찌른것이 아니라, 타인의 손에 의해 눈의 "잃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불러올 다음의 두가지 의미를 생각할 때 관객들에게 너무나도 큰 아쉬움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첫번째로, 이미지와 모습에 관한 것이다. 김승유는 계유정난 이전의 소위 엄친아이자 지적인 학자의 모습도, 계유정난 이후 "의"를 추구하는 반란군 수장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평범한 필부의 모습이다. 사회적인 명예, 지위, 의리와 충성심 등의 단어는 더이상 그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들이 아니다. 복수를 내려놓음으로서 뭔가 초탈한 듯 보였지만 그것이 완전한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리 된듯한, 뭔가 아쉽고 허한 느낌을 주는 그런 모습이었다(영어에서 "abnegation"이라는 단어가 가진 늬앙스와 비슷). 결말에 등장한 김승유의 모습이 단순히 초월적 모습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세령이와 같이 있으면서 김승유가 마지막에 직접 한 말, "눈을 잃은 대신 마음을 되찾았고, 복수를 잃은 대신 그대를 얻었다"는 말은 실명이라는 사실에 슬퍼할 모든이들에게 조그마한 위로를 전한다. 눈을 잃음으로써 승유와 세령은 그동안 그들을 옭아매던 허울뿐인 이름 대신 둘만이 허용된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함"을 얻으며, 현상이 아닌 "실제"를 보게되며(그동안 김승유는 얼마나 against-ridden character였던가!), 명분대신 "실리"를(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눈 먼 사람이 어떻게 계속 복수에 정진하겠는가) 선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같이 떠나자던 세령에게 어딜가든 수양의 세상이라며(즉,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건 수양의 세상이란 뜻) 그 간청을 뿌리치던 승유는, 마지막 회에서 바로 옆에 수양이 탄 가마가 지나감에도 보지 못하고 딸아이 손을 잡고서 유유히 걸어가던 모습과 절묘하게 대비된다. 눈을 잃었음이, 신체적 불편이 아닌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상징함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의명분과 복수추구에서 보여지던 영웅의 모습, 치열한 감정, 죽음을 불사하려던 용기는, 김승유가 결국엔 마음을 평화를 얻기위해서 버려진 가치들이기에 다소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두번째로, 이는 "실제적" 문제에 관한 것이다. 장님이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단순히 복수를 내려놓은, 정신적으로 뭔가 초탈한 모습이라는 점 이상의 실질적인 신체적 결함과 장애를 시사한다. 장님이 되버린 김승유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세령이나 딸아이 없이는 밖에 돌아다니기도 힘들 것이고, 그렇다고 집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고, 농사를 짓는것도 힘들 것이다. 장님이기에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 없이는 생존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장님이 되 것은 수양에 대한 복수를 멈추게 하기 위한 필연적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잃어버린 눈은 세령이를 보고 지켜줬었고 또 딸아이도 볼 수 있을 뻔 한 눈이기도 하다. 필부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장님까지 되버린 김승유...드라마 초반에 봤었던 엄친아로서의 면모와는 180도 다른 모습은 너무나도 급격한 반전이었다. 앞을 못보는 김승유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혹시라도 딸은 결혼해버리고 세령이가 먼저 죽는다면 혼자 어떻게 살까하는 걱정까지 되었다.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제한적일것이고, 앞으로 모든 걸 부인과 딸에 의지해 살아가야할 김승유를 생각하니 너무 안되보였다. 복수를 중단시키는 장치 치고는 너무 잔인해보였다.

결말에 대한 이 혼란스럽고도 복잡미묘한 감정은, 전반적으로 해피엔딩이지만 김승유가 장님이라는 사실이 불러오는 안타까움, 연민이 불러오는 슬픈 정서 때문인 거 같다. 물론 눈을 잃고서 얻은 사랑, 가족, 심적인 고요는 정난이후 김승유가 결코 닿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이상향의 세계이기에 더없이 아름답고 숭고하다.  언젠가 조석주가 모든 걸 잊고서 세령이 데리고 도망가서 자식낳고 살아라고 했을 때 승유가 "다 잊고 산다...참으로 꿈결같은 얘기로다."라고 읊조렸던 것처럼 마치 꿈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실제 현실로 펼쳐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승유가 실명했다는 사실은 특히 드라마 초반에 보여줬던 멋있고 매력적인 미남 도령이었던 모습과 대비해 무척이나 안타깝고 아프게 느껴진다. 더불어 사랑하는 부인 얼굴도, 귀여운 딸아이 얼굴도 더이상 못본다는 사실은, 그동안 김승유가 겪었던 생사를 넘나들던 고난과 고통을 생각할 때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이다.

어쨌든, 드라마의 결말은 주인공에게 불가능해 보이던 꿈을 이루어주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꿈은 단순히 우연적인 것에 의해 손쉽게 그리고 완벽히 쟁취된 것은 아니며, 처절한 댓가와 맞바꾼 결과이다. 특히 김승유의 경우 이름과 가족을 잃으며 여태까지 처절하게 겪은 심적, 신체적 고통을 다 겪고 난 후 심지어 눈까지 멀어지며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간신히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꿈을 이루기까지의 여정이 눈물나도록 고통스러웠고 절박했다. 그리고 목숨을 건지고서 김승유와 세령이가 같이 사는 모습 또한 관객이 여태까지 봐왔던 양반 도령과 귀한 공주가 살아가는 럭셔리한 삶의 이미지는 확실히 아니었다. 물론 비단옷 입고 꽃신 신고 하인들 부리며 대궐같은 99칸 기와집에서 살지 않더라도 둘 사이의 신뢰와 사랑은 이 세상 어느 부부보다 단단하고 깊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꿈같은 곳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 및 그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이 마냥 좋아라 하기엔 여태까지 겪으며 잃어버린 가치들이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너무나도 큰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면 여전히 맘이 헛헛하고 아련함이 밀려온다.

다소 클리셰적인 면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눈을 잃은 김승유가 그저 안타깝고 불쌍하게만 보지 않아도 될 것같은 위안을 주는 한 구절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4막1장에서 장님이 된 글로체스터의 대사이다. 비록 부귀영화와 사회적 지위를 잃었다 할지라도, 그리고 무엇보다 눈을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이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의미와 해석도 가능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I stumbled down when I saw: full oft’ tis seen, 
Our means secure us, and our mere defects
Prove our commodities.
눈이 보였을 때는 넘어지기도 했지;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
편리한 수단은 우리를 방심하게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오히려 우리는 강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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