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로열 오페라 런던의 "Adriana Lecouvreur"를 보고왔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이어서 영화관에서 HD screening으로 쏘아주는 오페라 극장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고 있다. 나같은 opera buff들에게는 아주 바람직하고 좋은 현상인게, 비행기타고 일일이 날아가지 않아도 큰 화면으로 편하게 우리 동네에서 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ㅎㅎ
이 오페라는 19세기말, 20세기초 이탈리아 베리즈모(verismo: 사실주의, 현실주의) 계열로 분류되는 칠레아(Francesco Cilea)의 출세작이다. 칠레아는 푸치니랑 비슷한 분위기지만 화성에 있어서 다소 실험적인 면모가 보이며, 전반적으로 선율이 굉장히 섬세하면서 아름다운 편이다. 이번 로열 오페라 프로덕션에는 현재 왕성한 활동을 하는 테너 중 지존이라 생각하는 요나스 카우프만이 나오는지라 무조건 볼려고 했었다. 게다가 지난주에 학교에서 선생님이랑 같이 공부했던 아리아 "poveri fiori"(가련한 꽃들)가 바로 이 오페라에 실려있는지라 요나스님도 보고 공부하는 곡도 들을겸 겸사겸사 무척 기대를 했었다. 결과는...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공연 보고 난 후 든 생각은 DVD가 나온다면 얼른 사야지 하는 것. 다음에 오페라 수업을 하게 된다면 반드시 학생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다. 노래도 좋고, 연기도 좋고, 화면도 좋고 전반적으로 완성도가 아주 높은 편이다.
18세기의 코메디 프랑세즈를 배경으로 이 극단의 유명배우인 아드리아나와 연인인 작센의 마우리치오 백작, 백작을 연모하는 유부녀인 부와용 공작부인 이렇게 세명이 얽힌 삼각관계가 중심이다. 결국 이글거리던 질투심이 폭발한 공작 부인이 보낸, 독에 담근 제비꽃 향기를 맡고서 아드리아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 무대가 무대인만큼 18세기 프랑스 극단의 화려한 무대, 휘황찬란한 드레스와 보석들, 무대장식 등 여태까지 봤던 오페라 중 무대가 가장 호화로웠다. 극단이 중심인 만큼, 극작품과 관련된 내용도 많이 나왔다. 예를들어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 세 여신을 두고서 누가 제일 아름다운 지를 결정하는 "파리스의 심판"(Judgement of Paris-파리스가 결국 아프로디테(비너스)를 최고의 미로 결정하는 바람에 나머지 두 여신은 격노하게 되고, 결국은 트로이 전쟁을 불러오게 된다)은 무대 속 발레극으로 보여지며, 부와용 공작부인은 아드리아나에 대한 비꼼의 의미로 "버려진 아리아나"(Ariana abbandonata-몬테베르디의 소실된 오페라)를 언급하기도 하며, 아드리아나는 이에 대한 반격으로 "페드라"의 한 장면(아내가 자신의 불륜을 고백하는 장면)을 무대 위에서 낭송하기도 한다.
*독에 담겼던 제비꽃 향기를 맞고서 절망하는 아드리아나. 저 제비꽃은 원래 아드리아나가 마우리치오에게 준 건데, 마우리치오는 그걸 부와용 공작부인에게 줬다. 공작부인은 제비꽃을 독에 담근 후, 시들어버린 채로 상자에 담아 아드리아나에게 돌려보낸다. 마치 마우리치오가 보낸 것처럼 위장하고서는... 다 죽어버린 꽃을 보고서는 아드리아나는 모든 것이 끝났고 절망만이 남았다며 "가련한 꽃" 이 노래를 부르며, 불 속으로 꽃을 던져버린다.
비쥬얼적인 면과 더불어 노래와 연기도 다들 최고. 카우프만도 너무너무 멋있게 백작 역할을 잘해주었다. 카우프만이 무대에서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 보면은 이 사람은 무대에서 살수 밖에 없게끔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모든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캐릭터 그 자체로 느껴지고 진정성이 넘쳐난다. 사실 마우리치오 캐릭터로만 봤을 때 약간 맘에 들지 않는 면이 많지만 카우프만이 워낙 멋있고 분위기가 좋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아드리아나를 맡은 안젤라 게오르규 또한 워낙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는지라 중간중간 아리아가 끝날때 마다 많은 박수를 받았다. 현실세계에서 최고의 디바로 일컬어지는 소프라노가 극 중에서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여배우 역할을 하니 딱맞는 옷을 입은 듯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카우프만과 게오르규는 이 오페라 외에도 평소에 팀을 이루어 같이 공연하는 일이 많은 만큼, 전반적으로 둘 사이의 호흡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우프만과 최고의 케미스트리를 보여주었던 소프라노는 바그너 "발퀴레"에서 카우프만과 연인으로 나왔던 Eva-Maria Westbroek이다. 둘은 그냥 연인 그자체로 보였다. 마치 "공주의 남자"에 승유와 세령이 같았다)
*마우리치오가 아드리아나에게 사랑의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 "Die Liebe macht mich zum Dichter"(사랑은 나로 하여금 시인이 되게 합니다-원래 이탈리아어인데 자막이 독일어다)
11월 8일날 카우프만과 게오르규가 뉴욕에서 이 오페라의 콘서트 버젼 공연을 할 예정이다. 6월달에 공연 소식을 알고서는 바로 예매를 했었다. 너무너무 기대된다. 오늘 봤던 로열 오페라만큼, 아니 그 이상의 케미스트리를 보여주길 바란다.
지난번 수업시간에 스승님과 어쩌다가 오페라의 세계에 접어들게 되었는지에 대해 얘기하던 중 마리아 칼라스를 주로 들으면서 오페라에 빠지게 되었다고 하셨다. 칼라스 목소리 자체는 "strange voice"임에 비해 노래에서 마성의 힘이 느껴진다고 그러시던데, 칼라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완전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이유는, 칼라스 목소리에서 가끔씩 감지되는 심한 wobble은 정말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목소리 자체도 텁텁한 편이고 그렇다고 테크닉이 카바예만큼 압도적으로 좋은편도 아니고. 칼라스의 전설적 명연이라 일컬어지는 벨리니의 "노르마"를 비롯해 유툽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클립들을 들어봤지만 이때까지 한번도 칼라스가 다른 성악가들에 비해 No.1으로 선택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 칼라스가 최고로 다가오는 유일한 아리아가 딱 하나가 있는데, 바로 조르다노(Umberto Giordano)의 "안드레아 셰니에"(Andrea Chenier) 중 "어머니는 돌아가시고"(La mamma morta)이다. 이 노래만큼은 칼라스가 최고다. 그의 다소 어두운 음색에서 울려퍼지는 처절하면서도 힘있는 표현력은, 연인의 정적의 마음을 돌려놓는 마달레나의 진심어린 마음을 너무나도 '정직'하게 보여준다. 인간적인 목소리의 호소력 있는 울림...적어도 이 노래에 관해서라면 칼라스말고 다른 성악가들은 차선에 머물 것 같다.
*이 아리아는 영화 "필라델피아"에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 극중 에이즈 환자인 톰 행크스가 변호사인 덴젤 워싱턴의 무심했던 마음을 여는 것은, 말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감정적 호소도 아닌 바로 이 아리아이다. 마치 오르페우스의 리라 연주가 지상과 지하세계를 일깨웠던 것처럼...칼라스의 목소리로 이 아리아가 들려지는 동안 음악에 완전히 몰입된 채 선율과 가사를 따라가는 톰 행크스를 본 후 변호사인 덴젤 워싱턴은 이 에이즈 환자에 대해 마침내 깊은 공감과 동화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Youtube Cr: toxicorangetunes)
프랑스 혁명의 날, 귀족의 딸이였던 마달레나는 엄마도 죽고 집도 불에타고 하녀 베르시와 함꼐 도망자 신세가 된다. 하룻밤만에 사회적 지위, 가족, 재산 모든 걸 잃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 마달레나집 하인의 아들이었던 제라르는 혁명당원이 되어, 반혁명분자로 찍혀버린 안드레아 셰니에(마달레나의 연인)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있다. 제라르는 주인댁 따님이었던 마달레나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삶의 저 벼랑 끝에 서있던 자신이 셰니에와의 사랑의 힘으로써 삶을 포기하지 않게 되었음을 이 아리아를 부르면서 보여준다. 마달레나의 호소력있는 노래에 감동받은 제라르는 그녀에 대한 마음을 결국은 접으며 셰니에를 도와주는 쪽으로 선회하게 된다(이 부분은 마치 바그너의 "발퀴레" 2막 4장인 브륀힐데와 지그문트 사이의 "Todesverkündigung"장면을 연상시킨다. 죽음을 선고하기 위해 지그문트를 찾아간 브륀힐데는 지글린데에 대한 지그문트의 죽음을 불사한 사랑에 감동받아 결국은 어버지인 보탄의 명령을 어기고서 지그문트의 편에 서게된다).
아리아의 초반부에선 마달레나가 얼마나 절망과 좌절의 상황에 있었는지를, 후반부에선 셰니에와의 사랑을 통해 이를 극복하였는지를 그린다.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는 그 전환지점에서 단선율의 첼로를 배경으로 칼라스의 목소리 라인이 D에서 D# (2:44 지점-어둡고 암담했던 단조에서 장조로의 모드 변화를 알리는 시그널)으로 넘어갈 땐 마치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서서히 내려오는 듯한 느낌이다. 극적인 변화를 이끄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이 반음 진행에 의해 나온다. BDF# 단화음에서 BD#F# 장화음으로 바뀌게 됨과 동시에, 음악 형식적으로도 레치타티브 및 서주역할의 Part1에서 보다 선율적이고 역동적인 리듬적의 Part2로 넘어가게 된다. 필라델피아 클립에 보면은 톰 행크스 또한 D에서 D#으로의 진행이 불러오는 음악적 의미(단조에서 장조로)와 가사 및 드라마의 의미(절망에서 희망으로)에 대해 깊이 느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 얼굴 표정과 온 몸의 제스쳐로 표현되고 있다. 아래의 가사는 희망을 그리는 후반부 내용.
[...]
che a me venne l'amor!
Voce piena d'armonia e dice
Vivi ancora! Io son la vita!
Ne' miei occhi è il tuo cielo!
Tu non sei sola!
Le lacrime tue io le raccolgo!
Io sto sul tuo cammino e ti sorreggo!
Sorridi e spera! Io son l'amore!
Tutto intorno è sangue e fango?
Io son divino! Io son l'oblio!
Io sono il dio che sovra il mondo
scendo da l'empireo, fa della terra un ciel! Ah!
Io son l'amore, io son l'amor, l'amor
당신은 반드시 사셔야 합니다, 저는 삶 그 자체입니다!
당신의 천국이 제 눈 속에 있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제가 그 눈물을 닦아드리겠습니다.
제가 당신과 함께 걸으며 버팀목이 되드릴 것입니다!
미소와 희망을 가지세요! 저는 사랑입니다!
피와 고통의 수렁에 빠져 계십니까?
저는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잊게 해드리겠습니다!
저는 세상을 구한 신입니다.
저는 하늘에서 내려와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 것입니다!
저는 사랑, 사랑, 사랑입니다!
*톰 행크스의 완전히 몰입한 명연기가 빛나는 장면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위에서 언급한 전반부에서 후반부로의 전환지점에서 밝은 조명이 갑자기 컴컴해지면서 벽난로의 이글거리는 붉은 불빛이 이를 대체한다. 마치 마달레나와 톰의 삶에 대한 의지의 불꽃이 솟아로오르는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와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 것"이라는 가사에 부합하듯 카메라 앵글 또한 위에서 내려보는 시선을 취하고 있다. 아리아는 처음에는 객관적 감상의 대상으로 들려졌지만 곡이 진행될수록 주인공 인물의 내면적, 주체적 목소리로서 승화된다. 이 영화의 감독, 촬영감독, 배우는 "La mamma morta"가 오페라의 어떤 상황에서 노래되는지, 아리아의 음악적 구조가 어떻게 가사와 부합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Youtube Cr: prussianblue0)
오늘 목요일 수업때 다룰 아티클 읽다가 공주의 남자를 생각나게 하는 구절을 발견하였다. 바로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번뇌에 관한 것이다. 즉, 드라마나 희곡에서 영웅적인 캐릭터가 흔히 처하는 딜레마는 다음과 같다.
국가와가문을위한희생(대의명분) VS 실제행복추구 (개인적삶)
공주의 남자에서 김승유는 정의(단종 복위 및 가문의 명예)를 위해 복수의 길과, 그런 위험한 레지스탕스같은 삶 내려놓고서 평범한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살고싶어하는 개인적인 바램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딜레마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고전의 한 구절을 Scott Burnham의 “Beethoven Hero”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다.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그 해석들 중 공통점은 영웅을 죽거나 살거나에 상관없이 승리자로 읽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러한 승리자가 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적들을 대항해 맹렬히 싸우다가 결국은 어렵게 어렵게 물리침으로써 승리자의 월계관을 쓸 수도 있으며(결국은 살아남는 결말), 둘째로 장렬히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영웅의 명예를 얻을 수도 있다(결국은 죽게되는 결말). 영웅에 대한 이 두 가지 시나리오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저자인 Burnham은 호머의 "일리아드" 중 아킬레스의 말을 인용한다.
In Marx’s interpretation, Napoleon can become Napoleon only
through successful interaction with his troops. For Lenz, the hero must die in
order to obtain eternal glory. This was the fatal transaction made explicit by
Achilles in the Iliad: as he says in book9, lines 410-416: “I carry two sorts of destiny toward the day of my death. Either, if I
stay here and fight beside the city of the Trojans, my return home is gone, but
my glory [kléos] shall be everlasting; but
if I return home to the beloved land of my fathers, the excellence of glory [kléos]is gone, but there will be a long
life left for me, and my end in death will not come to me quickly.”
(quoted from Scott Burnham, Beethoven Hero, pp.19-20)
“내가 죽음의 운명을 맞이하는데는 두 가지 길이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트로이 성밖에 머물면서 계속해 싸운다면 결코 집에는 돌아 갈 수는 없을 것이나 나의 명예는 영원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나의 조국으로 돌아가버린다면 찬란한 명예는 잃어버릴 것이나, 당장 닥칠 죽음에 대한 걱정 없이 장수를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정의라는 이름을 위해 이 한몸 바칠 것인가, 아님 허울뿐인 명예를 버리고 실리를 취할 것인가? 대의명분이 걸린 명예와, 개인의 행복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는 영웅은 비단 아킬레스만이 아니다.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의 이스마엘레가 그렇고, 벨리니의 "노르마"의 타이틀 롤, 로시니의 오페라 "탄크레디" 중 탄크레디와 아메나이데, "공주의 남자"의 김승유까지 그런 갈등에 빠져 고뇌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은 동서고전 통틀어 한 둘이 아니다.
다시한번 공주의 남자 결말을 생각해본다면, 결코 양립될 수 없는 이 딜레마를 적절한 선에서 잘 조율한 것 같다. 김승유가 자의로 복수를 버렸다면 그는 가문을 저버린 불효자식임과 동시에, 끝까지 행동하는 충신으로 남길 포기한 겁쟁이(변절자는 아니더라도)가 되었을 것이다. 이리 되면은, 영웅으로 시작했지만 결말은 사랑에 눈이 멀어 도의며 집안을 저버린 찌질이의 감상적 사랑놀음(naive sentimentalism)으로 빠지게 된다. 반면에 대의명분을 짊어지고서 복수만 계속 추구하다 결국은 전사한다면 이때까지 집안까지 저버리고 헌신했던 세령이의 사랑 및 영웅의 험난했던 삶의 여정이 조금이나마 보상받기를 바라던 관객의 희망은 모두 물거품 된 채 남는 것 하나없이 냉소적 허무주의(cynic nihilism)로 끝나게 될 것이다. 즉, 승유의 캐릭터가 온전히 보존되기 위해선 사랑만 택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복수의 대의명분만을 추구해서도 안된다. 특히나, 해피엔딩(즉 승유와 세령이 함께 사는 결말)으로 끝날 것이라면 복수추구에서 개인의 행복 추구로 넘어가는 전환이 덜 무리하게, 덜 억지스럽게, 김승유라는 캐릭터가 이때까지 보여준 도덕성(효심 및 충정)과 따뜻한 인간애(세령이에 대한 사랑)에 최대한 스크래치가 덜 나게끔 이뤄져야한다. 여태까지 공주의 남자에서 설정된 두 축인 대의명분과 개인의 영달은 김승유에게 있어 이세상에서는 결코 양립될 수 없는 가치임을 너무나 잔인할 정도로 각인시켜주었기 때문에, 이 두 축을 거슬러 한 축에서 다른 한축으로의 이동은 드라마적, 캐릭터적인 면에서 상당한 부담을 동반하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작가들의 해결책은 이 둘을 어떻게든 중도에서 조율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복수를 완벽히 자의로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세령이와의 사랑도 지켜나가는 길. 이는 김승유의 "눈이 멀었음"을 통해 어느정도 가능해진다. 승유가 어느날 복수가 갑자기 하기 싫어서, 또는 세령이랑 그냥 살고 싫어서 복수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눈이 멀었기 때문에 복수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는, 복수 중단에 대한 외부적, 타자적인 요인을 설정함으로써, 대의명분의 추구에서 개인의 행복 추구로 넘어가는 변환이 어느정도 필연성을 가지며 그러한 극에서 극으로의 이동이 다소 덜 무리하게 느껴지는 효과를 나았다. 물론, 눈의 "잃음을 당했다"라는 점 때문에 완벽한 영웅으로서의 면모는 다소 희석된 점 또한 사실이다. 실제로, 결말에 등장한 김승유는 금상 위 좌상이었던 김종서의 막내 자제도 아니며, 문장과 글에 능하던 성균관의 지적인 학자도 아니며, 수양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반란군의 수장도 아닌, 그저 이름없는 일개 서민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김승유가 자의로 대의명분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겁쟁이"가 되버리는 무리수에 빠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행복도 잃지 않는 결말은, 결과적으로 영웅성이 약해졌다 할지라도 극단적인 두 가치를 주어진 상황 하에서 할수 있는 한 최대로 부드럽게(그래서 공감가고 설득력이 느껴지는) 중재한 것으로 보인다. 김승유는 끝까지 복수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그래서 옥사에서 세령이랑 아기까지 놓아두고선 죽으려고 했었다), 이제는 장님이 된버린 현실이 도저히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복수의 길을 포기한 것은 완전한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며, 개인의 영달 추구라는 결과는 복수포기(비록 타의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와 동시에 얻게되는 필연적인 선택이 되버린다.
확실히, 장님이라는 설정은 드라마 전반부에 보여줬던 잘생기고, 멋있고, 비쥬얼적인 면으로 압도했던 김승유와는 너무 대비된다. 하지만 그런 무리수의 설정을 통해서라도 해피엔딩을 이끌어낸 작가들은 아킬레스도 결코 결론 내릴 수 없었던 딜레마를,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으로 풀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어려운 난제를 최선으로 매듭지은 작가진께 박수를 보낸다.
그동안 가볼려고 맘먹었던 이우환 특별전을 보러갔다. 토욜 오후는 무료라 그런지 미술관 문앞부터 길게 줄이 늘어져있었지만 한 10정도 기다리자 바로 입장. 구겐하임은 여태까지 뉴욕에서 본 전시 중 가장 좋았던 전시인 칸딘스키 특별전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게 작년 1월인가 그랬으니 그때 이후 거의 1년 반만에 다시 가는게 된다.
구겐하임이 사실 미술관 건물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작품이다. 보통의 미술관들은 각 방들이 통로문을 통해 이어져 있는 반면 구겐하임은 나선형으로 한번에 쭉 이어진다. 특별히 계단을 오르내릴 일도 없고 공간에서 공간으로 움직인다는 "이동감"도 느껴지지 않느다. 그냥 선을 따라 쭉 걷다보면 다음 작품이 보이고, 그렇게 하다 어느새 1층에서 저 높은 꼭대기층까지 이르게 된다. 어떠한 단절도 없다. 이동하는 동안 하나의 시간이 선적으로 무한히 연장되고 확대되어 나아간다. 전시의 타이틀인 "Making Infinity"와 구겐하임의 공간구성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대목이다.
*동영상의 0:24 경에 나오는 장면-돌의 무게로 밑에 깔린 유리를 깨어 갈라지는 선을 만드는 장면. 처음 봤을 때는 어떻게 무엇으로 저 형태의 유리선이 만들어졌을까 궁금했었다.
아래는 뉴욕타임즈에 실린 리뷰. 이 리뷰의 타이틀처럼 전시는 상당히 철학적이다. 마치 시각으로 표현된 철학 책의 한 챕터를 읽은 느낌이다. 사실 이 전시를 보는 동안, 작품 자체가 주는 비쥬얼적인 효과보다는 오히려 그 작품의 존재가 던지는 메세지 자체가 더 크게 다가왔다. 조그만 점이 모여 선이되고, 이 선은 다시 면을 이루고 그 면은 궁극에 주위 배경과 완전히 합일이 되어 사물과 배경의 구분조차 초월하게 된다. 선과 색은 미니멀리스트 계열답게 간단하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화두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존재함은 무엇인지? 눈에 보이는 현상(phenomenon as opposed to noumenon)은 과연 본질일까?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감상자에게 실존철학, 현상학에 관련된 의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었다.
"공주의 남자"가 지난 6일날로 끝이났다. 7월달 첫 1회부터 시작해서 시차때문에 수목 아침마다 떨리는 손으로 기다리던 24부작. 나이아가라 여행중에도 그 버벅거리던 인터넷을 붙잡고 계유정난을 그리던 에피소드를 끝까지 보고자 바둥거리던 것, 호텔 체크인 할때마다 오로지 드라마에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확인하고자 데스크 가서 인터넷 연결 아이디와 비번을 매번 물어보던 게 엊그제 같은데...역시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는 법이다.
6일날 수업마치고 아는 선배랑 밤 늦게까지 차마시고 놀다가 밤 한 10시부터 23, 24회를 보기 시작했다. 그 전날인 수요일은 학교 수업이 늦게까지 있었던데다 마치고 오페라 보러 갔기때문에 도저히 23회를 볼 시간이 없었다. 아무튼 마지막 두편 시청을 끝내니 밤 12-1시쯤이었다. 이때부터 쏟아지는 폭풍 눈물ㅠㅠ
목요일 오전에 수업시간 중간에 너무나도 결말이 궁금한 나머지 네이버 검색으로 결말이 해피엔딩이라는 점만 간단히 숙지했음에도 불구, 눈 앞에 실제로 펼쳐진 결말은 마냥 룰루랄라 좋고 쾌활하지만은 않은, 뭔가 아련하고 아쉽고 안타깝고 그러면서 다행이기도 한 여러가지 감정과 정서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마지막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오페라와 드라마(주로 사극)을 봐왔지만 해피엔딩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을 안겨다주는 작품은 정말 처음이다...
*이 장면부터 시작해 본격적으로 꺼이꺼이 통곡하기 시작...김승유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그동안 자신과 수양 사이에서 승유가 얼마나 괴로웠을 것을 이해하는 세령이기에 같이 떠나자는 말조차도 하지 않겠다고 할 땐 정말 가슴치며 울었다...ㅠㅠㅠ
문제는 왜 그렇게 결말을 읽었냐인데...해피인데 왜 그리 끊임없이 눈물이 나고, 마음이 아픈지... 밤을 하얗게 새버렸다. 아침 8시까지 엔딩의 여운과 흐르는 눈물땜에 잠도 못자고, 3시간 자고 선배 만나러 학교 갔다. 마치 5월 14일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바그너 "발퀴레"를 보고 충격 받아서 잠 못자고 텍스트 읽고, 예전에 읽었던 논문 다시 꺼내 울면서 읽고, 음악 주구장창 들으며 밤을 새웠던 것과 비슷한 현상. 따라서 본 글은 어쨌든 해피엔딩으로 끝난 "공주의 남자"가 그 행복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왜 가슴아픈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 어찌보면 완전한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다는 단상들에 대한 것이다.
계유정난 이후 김승유가 복수심으로 불타며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폭주할때 속으로는 제발 저 짐을 내려놓길 바랬었다. 이개 스승님도 죽은 줄 알았던 제자를 만났을 때, 복수의 칼날을 버리고 인간답게 사는 길을 가길 원한다는그런말을 했던거 같다. 죽은이들이 못다이룬 복수의 대업을 모두 떠안고서 실패일지 성공일지 모를 결말-하지만 역사적 사실도 그렇고 극중 상황도 그렇고 실패임을 모두 직감하는 듯 했다-을 향해 마치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뛰어드는 김승유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괴로웠다. 그렇게 뒤도 안돌아보고서 복수의 길을 걷는 것이 순전히 자기 의지라면 덜 괴로웠을텐데, 대의명분을 위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이 김승유 자신의 진솔한 의지와는 반하는 것이기에 더 보기가 힘들었다. 결국엔 수양과 단둘이 대면했을 때 김승유가, 죽어도 상관 없다고, 내가 실패하면 다른 사람이 또 일어날거고, 그 사람이 실패하면 다른 사람이 또 대신해 일을 도모할거라는 말하는 것을 보며 저 인간은 결코 자기가 먼저 나서서 대의를 포기하는 일은 없겠구나라는 걸 확인하며, 복수의 짐을 내려놓는 것은 불가능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막판 반전에는 마침내 그 짐을 자의든 타의든 내려놓고 눈이 멀어버린 김승유가 등장한다. 그동안 김승유의 어깨에 걸린 짐이 얼마나 무겁고 숨조차 쉬지 못하게 할만큼 존재를 짓누르던 것임을 알기에 차라리 한쪽 눈을 잃었을지라도 마음의 평안을 찾은 것은 너무나도 다행스럽고 관객으로서 바라던 바가 이뤄진 순간이었다. 이개 스승님, 조석주, 나, 그리고 수많이 관객들이 바라던 바가 바로 고통받는 주인공의 마음의 평안, 나아가 정신적 구원이 아니었던가. 지하에 계신 종서 아버님조차도 아들이 가문의 복수를 위해 자폭의 길을 걷기보다는 행복과 평안의 삶을 가지길 바랬을 것이다.
*마지막 반전: 내려놓지 못했던 짐을 결국은 버리고서 마음의 평안을 되찾은 승유. 베르길리우스의 "에네이드"에 보면 이런말이 나온다 "도대체 어떤 운명이 너를 기다리고 있길래 그토록 많은 고통과 아픔이 따르는가." 거듭된 실패 이후 예정된 운명은 처절한 죽음 뿐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사랑하는 여인과 부부의 연을 맺고서 행복하게 잘 사는 운명이 김승유를 기다리고 있었다...비록 눈을 가져갔을지라도 말이다.
막판에 김승유의 눈이 멀어버렸다는 사실은 그러나 당혹스럽게 다가왔다. 물론 눈이 먼다는 것은 감각을 초월해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것을 상징하는 메타포로서, 문학작품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다소 클리셰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예를들어 자신의 과오를 알게된 오이디푸스 왕은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는데 이는 죄업에 대한 속죄이자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겠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왕과 김승유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승유의 경우 자의가 아닌 타의로 눈을 잃었다는 점이다. 자신 스스로 감각의 세상을 초월하고자 눈을 찌른것이 아니라, 타인의 손에 의해 눈의 "잃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불러올 다음의 두가지 의미를 생각할 때 관객들에게 너무나도 큰 아쉬움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첫번째로, 이미지와 모습에 관한 것이다. 김승유는 계유정난 이전의 소위 엄친아이자 지적인 학자의 모습도, 계유정난 이후 "의"를 추구하는 반란군 수장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평범한 필부의 모습이다. 사회적인 명예, 지위, 의리와 충성심 등의 단어는 더이상 그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들이 아니다. 복수를 내려놓음으로서 뭔가 초탈한 듯 보였지만 그것이 완전한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리 된듯한, 뭔가 아쉽고 허한 느낌을 주는 그런 모습이었다(영어에서 "abnegation"이라는 단어가 가진 늬앙스와 비슷). 결말에 등장한 김승유의 모습이 단순히 초월적 모습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세령이와 같이 있으면서 김승유가 마지막에 직접 한 말, "눈을 잃은 대신 마음을 되찾았고, 복수를 잃은 대신 그대를 얻었다"는 말은 실명이라는 사실에 슬퍼할 모든이들에게 조그마한 위로를 전한다. 눈을 잃음으로써 승유와 세령은 그동안 그들을 옭아매던 허울뿐인 이름 대신 둘만이 허용된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함"을 얻으며, 현상이 아닌 "실제"를 보게되며(그동안 김승유는 얼마나 against-ridden character였던가!), 명분대신 "실리"를(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눈 먼 사람이 어떻게 계속 복수에 정진하겠는가) 선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같이 떠나자던 세령에게 어딜가든 수양의 세상이라며(즉,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건 수양의 세상이란 뜻) 그 간청을 뿌리치던 승유는, 마지막 회에서 바로 옆에 수양이 탄 가마가 지나감에도 보지 못하고 딸아이 손을 잡고서 유유히 걸어가던 모습과 절묘하게 대비된다. 눈을 잃었음이, 신체적 불편이 아닌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상징함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의명분과 복수추구에서 보여지던 영웅의 모습, 치열한 감정, 죽음을 불사하려던 용기는, 김승유가 결국엔 마음을 평화를 얻기위해서 버려진 가치들이기에 다소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두번째로, 이는 "실제적" 문제에 관한 것이다. 장님이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단순히 복수를 내려놓은, 정신적으로 뭔가 초탈한 모습이라는 점 이상의 실질적인 신체적 결함과 장애를 시사한다. 장님이 되버린 김승유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세령이나 딸아이 없이는 밖에 돌아다니기도 힘들 것이고, 그렇다고 집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고, 농사를 짓는것도 힘들 것이다. 장님이기에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 없이는 생존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장님이 되 것은 수양에 대한 복수를 멈추게 하기 위한 필연적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잃어버린 눈은 세령이를 보고 지켜줬었고 또 딸아이도 볼 수 있을 뻔 한 눈이기도 하다. 필부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장님까지 되버린 김승유...드라마 초반에 봤었던 엄친아로서의 면모와는 180도 다른 모습은 너무나도 급격한 반전이었다. 앞을 못보는 김승유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혹시라도 딸은 결혼해버리고 세령이가 먼저 죽는다면 혼자 어떻게 살까하는 걱정까지 되었다.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제한적일것이고, 앞으로 모든 걸 부인과 딸에 의지해 살아가야할 김승유를 생각하니 너무 안되보였다. 복수를 중단시키는 장치 치고는 너무 잔인해보였다.
결말에 대한 이 혼란스럽고도 복잡미묘한 감정은, 전반적으로 해피엔딩이지만 김승유가 장님이라는 사실이 불러오는 안타까움, 연민이 불러오는 슬픈 정서 때문인 거 같다. 물론 눈을 잃고서 얻은 사랑, 가족, 심적인 고요는 정난이후 김승유가 결코 닿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이상향의 세계이기에 더없이 아름답고 숭고하다. 언젠가 조석주가 모든 걸 잊고서 세령이 데리고 도망가서 자식낳고 살아라고 했을 때 승유가 "다 잊고 산다...참으로 꿈결같은 얘기로다."라고 읊조렸던 것처럼 마치 꿈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실제 현실로 펼쳐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승유가 실명했다는 사실은 특히 드라마 초반에 보여줬던 멋있고 매력적인 미남 도령이었던 모습과 대비해 무척이나 안타깝고 아프게 느껴진다. 더불어 사랑하는 부인 얼굴도, 귀여운 딸아이 얼굴도 더이상 못본다는 사실은, 그동안 김승유가 겪었던 생사를 넘나들던 고난과 고통을 생각할 때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이다.
어쨌든, 드라마의 결말은 주인공에게 불가능해 보이던 꿈을 이루어주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꿈은 단순히 우연적인 것에 의해 손쉽게 그리고 완벽히 쟁취된 것은 아니며, 처절한 댓가와 맞바꾼 결과이다. 특히 김승유의 경우 이름과 가족을 잃으며 여태까지 처절하게 겪은 심적, 신체적 고통을 다 겪고 난 후 심지어 눈까지 멀어지며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간신히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꿈을 이루기까지의 여정이 눈물나도록 고통스러웠고 절박했다. 그리고 목숨을 건지고서 김승유와 세령이가 같이 사는 모습 또한 관객이 여태까지 봐왔던 양반 도령과 귀한 공주가 살아가는 럭셔리한 삶의 이미지는 확실히 아니었다. 물론 비단옷 입고 꽃신 신고 하인들 부리며 대궐같은 99칸 기와집에서 살지 않더라도 둘 사이의 신뢰와 사랑은 이 세상 어느 부부보다 단단하고 깊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꿈같은 곳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 및 그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이 마냥 좋아라 하기엔 여태까지 겪으며 잃어버린 가치들이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너무나도 큰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면 여전히 맘이 헛헛하고 아련함이 밀려온다.
다소 클리셰적인 면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눈을 잃은 김승유가 그저 안타깝고 불쌍하게만 보지 않아도 될 것같은 위안을 주는 한 구절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4막1장에서 장님이 된 글로체스터의 대사이다. 비록 부귀영화와 사회적 지위를 잃었다 할지라도, 그리고 무엇보다 눈을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이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의미와 해석도 가능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I stumbled down when I saw: full oft’ tis seen, Our means secure us, and our mere defects
Prove our commodities.
눈이 보였을 때는 넘어지기도 했지;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 편리한 수단은 우리를 방심하게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오히려 우리는 강해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