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24, 2012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엘렉트라"(Elektra)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는 예전에 뮌헨에서 2005-2006 시즌에 봤었고 재작년인가 메트 오페라에서 봤었는데, 고전적인 메트 보다도 바이에른 주립오페라가 훨씬 내 기억에 인상깊게 남아있다. 오늘 유툽 돌아다니다가 그때 봤었던 뮌헨 버젼을 우연히 찾았다. 바이에른 주립오페라에서 한건 아니지만 그 사촌이라 할 수 있는 뮌헨필과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참여한 공연이다.

비단 "엘렉트라" 뿐만이 아니라, 여태 본 오페라를 통틀어서 이 공연은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유는 바로 독특한 연출 때문. 미니말리즘의 극단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단순한 무대 (무대 소품도 거의 안 쓴다), 이에 부합해 조명또한 다채로움을 피한 채 붉은색과 하얀 빛이 중심이 된다. 뭔가 휑해 보일수도 있는 설정이지만, 무대 전면에 또 하나의 큰 벽을 놓음으로서 공간적으로 상당히 밀폐되고 답답하면서도 숨쉬기도 힘들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마치 그 무대를 바라보는 청중들이 폐쇄공포증을 겪게할려고 작정하기라도 한 듯 말이다.

이쯤해선 왜이리 무대를 답답하고도 비좁게 만들었냐는 불만이 있을법도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러한 심리적인 효과는 "엘렉트라"가 전달하는 전반적인 드라마적 분위기와 절묘하게 합치된다. 아버지를 살인한 어머니와 숙부에게 복수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내용이지만 실제 오페라 상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에 대한 복수에 이를 가는 엘렉트라, 그에비해 다소 소심하게 그려지는 여동생 크리소테미스, 그리고 엘렉트라 포스에는 다소 못미치는 아우 오레스테스. 이들에 대항해 언젠가 엘렉트라에게 죽어야할 악역이자 제물로 상정된 클리템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 드라마상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엘렉트라가 클리템네스트라를 도끼로 죽이는 장면인데, 이 장면을 제외하고선 이목을 사로잡을 스펙터클한 장면이나 따로 솎아낼만한 사건은 거의 없다.

그래서 "엘렉트라"의 드라마적 중심은 특정 사건이 아니라 오페라 전체를 관통하는 강렬하고도 말초적인 긴장감이다. 무엇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으스스하면서 음울한 분위기, 광인처럼 보이는 엘렉트라의 복수에 가득찬 감정(이 복수심은 바로 엘렉트라의 실존을 정의한다), 이에 맞서 아가멤논 왕의 살인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클리템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 이들이 내뿜는 심리적 갈등관계, 첨예한 대립이 바로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중심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의 궁전을 그대로 그린 사실적 무대가 아닌, 클립에서 보는대로 모던하면서도 압축적인 무대는 그러한 드라마적 긴장감을 극대화시켜 전달하는 효과를 낸다. 시각적인 눈요깃거리를 최대한 배제한 이러한 무대는, 동시에 또다른 긴장의 요체인 슈트라우스의 음악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끔 한다. 포스트 바그너리안 음악어법의 극단을 이끈 슈트라우스 작품답게, 사실 음악만 들어도 "엘렉트라"의 강렬한 파토스가 고스란히 전달됨을 느낄 수 있는데, 이런 팽팽한 긴장감이 지배하는 무대는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음악적 색채와 심리적 히스테리아를 중간 매체를 통하거나 방해물(distraction) 없이 "직접적"으로 청중에게 전달되게끔 한다.

이 연출에서 또하나 주목할만한 대목은 클리템네스트라를 도끼로 살인하는 장면이다. 이때 엘렉트라는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고 무대상에 그대로 있으면서 도끼로 땅을 찍어내린다. 그 행위가 보이는 바로 그 순간, 그 도끼에 살해되는 클리템네스트라의 비명 소리가 무대 뒤에서 처절하게 들린다. 이 살인장면은 그 잔인성 때문인지 몰라도 메트 연출에서는 엘렉트라가 무대 뒤로 들어가서는 클리템네스트라 더불어 모두 무대 뒤에 안보이게 하는 것으로, 그래서 음악만 들리는 것으로 처리되었었다. 그러나 클라이막스이자 엘렉트라의 드라마상 존재 이유가 실현되는 바로 그 순간에 주인공이 무대 뒤로 사라진다면 그 극을 보는 관객 입장에선 다소 김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무대 위에 엘렉트라가 그대로 있게 하며(주인공의 무대 존재, stage presence의 유지), 도끼로 사람이 아닌 땅을 내리찍는 행위를 함으로써 살인 장면을 "암시"하되 극단의 비명소리가 무대 뒤에서 들려짐으로써 클리템테스트라의 살해를 "실현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여태까지 유지되었던 극적 긴장감이 끊어지거나 줄어듬 없이 극대화된 채 그 정점을 찍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던한 연출은 작곡가 고유의 텍스트를 변형, 왜곡 시키거나 감독의 에고가 작곡가의 에고를 넘어서려는 만용이 느껴질 때가 많은지라 왠만하면 잘 마음이 가지 않는 편인데, 이번 "엘렉트라" 연출은 모던한 연출이되 드라마에 대한 관점이 작품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어 봤다고 생각되기에 상당히 맘에 든다.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지휘하는 뮌헨필. 엘렉트라는 린다 왓슨, 클리팀네스트라는 제인 헨셸, 오레스트는 알버트 도만. 제인 헨셸은 5월에 카네기홀에서 열린 "살로메" 콘체르탄테 공연 때 헤로디아스 역을 불렀었는데, 음색이나 연기력에 있어 가히 슈트라우스 스페셜리스트라 할만큼 뛰어난 해석력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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