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anuary 27, 2012

"공주의 남자", "해를품은 달", 그리고 베르디의 "운명의 힘"

"공주의 남자"에 이어 "해를품은 달"을 열심히 보는 중이다. 전자는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적 큰 틀에 어느정도 기반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전적으로 허구이다. 하지만 두 작품을 관통하는 큰 줄기는 무슨 수를 써도 끊어질 수 없는 인연의 끈, 즉 만날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게 되어있다는 운명을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인위적인 힘(무력이나 간계)으로 잠시나마 억지로 떼어놓을 수는 있을지 모르나 궁극적으로 이는 만나게 되어있는 운명을 거스르진 못한다. 아무리 집안의 원수가 되어 죽이니 살리니 해도, 승유와 세령은 죽음까지 불사하며(실제 마지막에 가서 이들은 그들을 옳아매던 "이름"을 잃고서 진정히 함께하는 삶을 얻게 된다. 즉 이름의 부재를 택함으로써 실제 존재의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결국은 부부가 된다. 아직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해를품은 달에서는 현재 인위적인 힘에 의해 이훤과 연우의 끈이 (겉보기에) 끊어져 있지만 궁극에는 그 끈이 이어지게 된다고 한다.

이걸 보니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이 생각난다. 베르디의 수많은 오페라 제목 중 가장 철학적이며 멋있다고 생각하는 "운명의 힘"은 위의 두 드라마와는 반대로 헤어져야만 하는 사람은 아무리 이어놓으려 해도 같이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역시 드라마에서와 비슷하게 집안의 반대에 당면한 두 남녀(레오노라와 돈 알바로)가 같이 도망친다. 그러나 함께한 시간도 잠시, 이내 헤어지며 쫓기는 신세가 된다. 만날 듯, 만날 듯 안타깝게 스쳐지나가는 순간이 계속되며 집안의 화해가 이루질 것 같은 희망도 던져주지만 결국엔 레오노라는 가문과 대의명분에 사로잡힌 오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돈 알바로 또한 뒤따라 죽는 것으로 암시된다 (오페라의 결말은 판본에 따라 다소 다르다).


*안젤라 게오르규가 부르는, "운명의 힘" 중 4막 처음부분에 나오는 "Pace pace o mio Dio" (신이시여 평화를 주소서). 동굴에 숨어든 레오노라가 이제 그만 평화를 달라며 신에게 호소하는 아리아. 아리아의 마지막 쯤 해서 레오노라가 외부인의 인기척을 들으며 그 대상에게 "저주를!"(maledizione) 이라는 말을 반복하는데, 알고보니 그는 돈 알바로였다. 

인간의 의지는 이미 예정된 운명, 즉 숙명을 거스를 수 없는가? "해를품은 달"과 "운명의 힘"은 "그렇다"는 대답을 들려주는 듯 하다. 대왕대비와 윤씨일가가 아무리 주술과 간계를 써도 연우의 자리는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될 수 없다. 운명의 힘에서도, 레오노라와 알바로가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고 고통받아도 함께할 수 없다는 운명은 끝끝내 바뀌지 않는다. 반면에 "공주의 남자"는 이에 대해 다소 다른 대답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령이와 승유가 주어진 상황을 뒤집고, 이에서 벗어나고자 얼마나 애썼고 죽음까지 불사하며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는지가 드라마 내내 너무나도 절절히 나왔기 때문에 그 행복한 결말을 단지 처음부터 그렇게 예정되어 있었다는 숙명으로 치부하기엔 그들의 의지와 노력의 과정이 너무나도 눈물 겨웠었다. 따라서 "공주의 남자"의 운명은, 이미 결론지어진 숙명이라기 보다는 내가 개척하고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의지 추구로서의 "운명"이라는 의미가 더 강해보인다.

Thursday, January 26, 2012

Preliminary Study-베르디의 "맥베스" 트레일러들

"맥베스"는 베르디가 쓴 셰익스피어 오페라 세 편 중 한 편이다 (나머지는 Otello와 Falstaff). 아마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부제가 더 잘 맞을 것같은, 권력과 탐욕으로 폭주하다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은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맥베스 부부에 관한 이야기다. 내용적인 면 때문인지, 베르디는 이 오페라에 대해 "멜로드라마"라고 명명하였다.

3월달에 두 번 보러갈 예정인 이 오페라에 대한 사전 연구의 일환으로 유툽에 떠있는 트레일러들을 찾아보았다. 메트에선 토마스 햄슨이 맥베스를, 나디아 미하엘이 맥베스 부인 역을 할 예정이다. 개인적으로, 맥베스 부인의 브레이크 없는 욕망 및 그와 맞닿아 있는 파멸의 연관고리가 어떻게 드라마적으로 표현될 것인지가 가장 궁금하다. 사실 이 부부의 몰락은 맥베스보다 더한 욕망 덩어리인 부인의 원인이 크다. 어떻게 보면 우유부단한 남편을 쪼아대고 부추겨서 결국은 살인을 저지르게 하는 것도 맥베스 부인. 그런면에선 오페라 내에서 가장 악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맥베스 부인을 마녀로 해석한 논문이 있기도 하다). 그외에도 마녀들의 동굴 장면 및 살인 장면이 어떤 연출로 독창적으로 처리될 것인지, 주역 가수들은 어떠한 음악적 해석을 들려줄지도 무지 기대된다.

1. 먼저 가장 영화적인 영상을 보여주는 코벤트 가든 트레일러. 피가 뚝뚝 흐르는 장면, 피인지 물인지 모르는 액체에 손을 씻는 장면이 거듭 나오며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긴다. 실제 무대 장면은 하나도 안나오지만 끈적끈적임과 동시에 흘러내리는 피의 이미지를 통해 오페라를 관통하는 "감정적 분위기"(살인, 복수, 파멸...)를 가장 잘 전달하고 있는 듯. 맥베스 부인의 주제라 할 수 있는 F단조 선율(서곡에서 이미 나온다)이 배경 음악으로 나온다.



2. 나디아 미하엘이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맥베스 부인으로 열연한 바이에른 주립 오페라 영상. 레이디 맥베스에 초점을 맞춘 편집 영상이다. 미모가 상당하다. 1:50지점부터 코벤트 가든 트레일러에 쓰인 음악과 동일한 음악인 맥베스 부인의 주제가 나온다.


3. 파리 국립 오페라. 비올레타 우르마나가 맥베스 부인 역을 맡았으며 연출이 상당히 현대적이다. 역시 코벤트 가든과 같은 음악 사용.



4. 도이체 오퍼 베를린의 트레일러. 메트에서 "돈 카를로"의 에볼리 공주를 맡았던 안나 스미로바가 맥베스 부인 역을 부른다. 역시 현대적인 연출인데 살인 장면에선 칼 대신 총을 쓰고 있다.


Cf. 페이스북이나 유툽에 올라오는 오페라 트레일러 영상을 비교해보자면, 메트의 경우 항상 너무 짧은 느낌이 강하다. 오페라 내에서 가장 극적이고 클라이막스적인 부분을 보여주지만 "감질나는 맛보기"이상은 절대 보여주지 않는 세침떼기같은 면이 있다. 트레일러로 한껏 호기심을 유발하면서 "보고싶으면 너네가 직접 와서 봐!"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가끔가다 낚시성 내용의 트레일러 등도 있다 (예-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베드신).

반면에 코벤트 가든의 트레일러는 편집이 가장 예술적이고 완성도가 높다. 메트의 트레일러들이 "맛보기" 이상을 결코 넘어가지 않는것에 비해, 코벤트 가든의 트레일러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작품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지성미와 우아함, 고귀함이 3분 내외에 트레일러에서 고스란히 풍겨져 나온다 (편집하는 사람 누군지 정말 궁금). 영상미가 뛰어나고 영화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독일 오페라단(도이체오퍼, 바이에른 주립 오페라)은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트레일러도 미국이나 영국 오페라단에 비해 보통 두배는 길고, 편집 또한 안꾸미고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마인드가 강한 듯.

Tuesday, January 24, 2012

김환기 회고전-못봐서 아쉬운 전시회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김환기 회고전. 한국에 있었으면 꼭 가서 봤을 전시회라 무척 안타깝다. 그의 작품이 옥션 시장에서 탑을 달린다는 사실은 제쳐두고라도, 김화백은 그림의 내용을 실현하는 방법, 즉 "텍스트"보단 그 텍스트를 실현하는 "방법"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달, 항아리, 꽃, 인물 등 (동양적인 대상을 그리는) 다른 작가들의 그림에도 흔히 등장하는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배치하고, 색채를 불어넣고, 입체적인 디멘션이 느껴지는 텍스쳐를 입히는 방식에 있어 김화백만의 독특함이 느껴진다. 특히 따뜻한 듯 하면서 손에 잡힐듯한 질감이 느껴지는 텍스쳐는 달, 항아리 등의 일상적인 소재가 더 친근히 다가오며 마치 우리가 보고있는 것을 만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김환기, "항아리와 매화" (1954)

그림속에 보여지는 대상, 즉 텍스트도 시각적으로 아름답지만, 그 텍스트를 실현하는 김화백만의 방식은 시각적 차원을 너머 촉각적 경험을 하게끔 이끈다. 작년에 뉴욕의 구겐하임에서 열렸던 이우환 전시회에서 봤던 작품들은 시각을 넘어 공간과 현상학(phenomenology), 실존 철학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던 반면, 김환기의 작품 중 특히 한국적인 정물을 소재로 하는 그의 작품은 친근함, 감촉, 따스함, 온기 등의 단어를 떠오르게 한다.   

갈 수 없어서 정말 아쉽다.
  
이번 전시에 대한 기사 중 가장 잘 쓴 것으로 보이는 글

Sunday, January 1, 2012

Happy New Year

밖에 불꽃놀이 소리가 나서 시계를 보니 2012년 1월1일 새벽 12시다. 바그너 페이퍼 쓰느라고 "발퀴레" 1막 중 지그문트와 지글린데의 러브듀엣을 듣는 중인데, 때마침 노퉁 모티브가 나오고 있었다.